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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재판
[ 아츠이 치시오 X 모리즈미 시노부 ]
(주의) 역전재판 시리즈 5 '역전학원' 에피소드의 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상 시 유의 부탁드려요.
< 悪たれ (심한 장난) >
선생님과의 면담, 오늘의 알림, 일정 정리, 모든 것을 해야 하고,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시노부는 매일 그 일들에 파묻혀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맑은 공기를 마셔가면서도 숨을 돌릴 수 있는 틈은 정말 조금, 아주 조금뿐. 그마저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아서, 또 다른 일을 떠맡게 되기도 십상이니 그녀는 다리를 멈출 수가 없다. 발을 계속해서 옮겨대어야만 했다. 그렇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계속해서 움직이면서도 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잠시 동안 시간이 났을 때, 그러니까 모든 일이 일단락되고 나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학교의 시계가 곧 종이 울릴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안식처가 되는 시노부의 동아줄.
"……시노부!"
"치시오, 많이 기다렸어?"
붉은 옷, 물감이 무늬처럼 튀어 있는 헤어밴드와 앞치마. 한 몸처럼 딱 붙어 있는 스프링 장치.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러 튀어나오는 활기찬 아이 한 명.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려 안아오는 몸짓이 언제나처럼 익숙하다. 오늘 웃었던 것들 중 가장 환한 웃음을 만면에 피우며 시노부는 치시오를 꽉 안아 주었다.
"오늘은 별 일 없었어?"
치시오에게 넌지시 묻는다.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마주해오며 볼 수 있는 살짝 착잡한 눈빛. 미루어 생각하자면 또 좋지 않은 말을 들었거나, 그랬겠지.
“그럼, 별 일 없었지.”
고개를 끄덕여오는 밝은 모습의 치시오는 건너편의 의자를 가져와 시노부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다른 의자를 재깍 끌고 와선 털썩 앉고 시노부가 마주 앉길 기대하는 표정.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을까? 귀여워져서 살짝 웃었다.
아츠이 치시오. 이름대로, 뜨겁고 열정적인 아이. 공부도 상위권. 하지만 친구관계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본인이 말한다. 검사를 목표로 하면서도 도예가를 꿈꾸는 훌륭한 친구. 시노부는 자신의 다리를 벤 채 잠들어버린 치시오의 머리카락을 슬쩍 헝클어뜨렸다. 이 아이는 언제쯤이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스프링 장치로부터. 검사 클래스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그녀’로부터.
아마도, 예상이 갈 것이다. 아츠이 치시오는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쭉 남자여야만 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리 원했고,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선생님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어련할까.
피다 만 꽃봉오리처럼 오므려져 있는 치시오의 손가락이 눈에 띄어 제 손가락을 살짝 끼워 본다. 지문에 닿자 더 오므리며 손가락을 잡았다 놓는다. 피곤했겠지, 오늘도. 이 무거운 기계를 달고 매일 아침 무슨 생각을 하며 학교에 올까. 무슨 생각을 하며 수업을 듣고 있을까. 상상이 가질 않아.
“치시오.”
입을 오물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담았다. 어느 날, 미술실에 혼자 앉아서 입을 막고 울고 있던 너를 본 순간부터. 왜 그렇게 울고 있어? 하고 묻는 대신에 이렇게 너의 이름을 불렀었지. 그리고 가까이 가서, 너를 안았어. 등을 쓸어주었지. 그제서야 너는 소리 내어 울었었다. 옆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던 나조차도 서러울 정도로 펑펑 울며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 또한 너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시노부….”
“응. 여기 있어.”
조곤조곤. 그녀를 안심시켰다. 얼굴이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웃었던 것 같았다.
“나도 평범하게 치마 입고 싶다.”
볼에 한껏 바람을 부풀리고, 볼멘소리로 치시오가 투덜거렸다. 시노부는 무어라 대답해줘야 할지 고민했지만,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게 좋지.
“머리핀도 꽂아보고 싶어.”
함께 고민해본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머리핀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시선이 집중되긴 하겠지만, 머리핀은 머리카락을 고정할 때 쓰는 용도인 것뿐이니까. 적당히 색깔이 들어간 정도라면….
“도자기 만드는 데에 영감이 필요한 셈 치고 꽂고 다닐까?”
베시시 웃었다. 시노부도 살짝 미소 지으며 치시오의 부풀려진 볼을 콕 손가락으로 눌렀다. 치시오의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다. 그녀의 말은 농담이지만, 진담이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물으려 했지만,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라고, 응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안 될 게 뻔하잖아. 라며 웃어넘겨버리고 슬픈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또 다시 볼 자신이 없기에.
‘뭐야, 그게.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라는 말을 지나가며 들었다. 시노부는 고개를 돌려 대화의 진원지를 파악했다. 붉은 색의 치시오가 곧바로 눈에 띈다. 순간, 덜컹. 하고 무언가가 속에서 울렁거렸다. 치시오의 눈 속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무언가. 약간 하얗게 된 낯빛. 그러면서도 애써 웃음소리를 내며 치시오는 할 말을 삼켰다. 시노부가 가까이 다가가 대화에 끼어들어보려 했지만, 치시오는 팔로 그녀를 막았다. ‘가자.’ 입모양으로 치시오는 시노부에게 말했다.
미술실의 문이 급하게 닫혔다. 아직 채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치시오는 철컥거리며 급히 자신의 몸에 있는 기계를 풀어대기 시작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이를 악문 채로, 끝없는 분노를 억누르며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철컥거리는 마찰음을 들으며 시노부는 가만히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치시오에게 있어서는 큰 화살이 되어 돌아왔을 테다.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방금 들은 말의 부정을 해 주어야 할지, 아니라면 응원해줘야 할지. 아직 채 정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만 있었다. 순간, 치시오가 신경질적으로 스프링 장치를 바닥에 내리꽂는다.
“싫어, 이제는….”
단말마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작은 목소리로 쥐어짜내듯이 말했지만, 시노부가 듣기에는 마구 질러대는 비명 같이, 심장이 덜컥 움직여서 황급히 그녀를 껴안았다. 사시나무처럼 천천히 떨고 있는 몸을 다독였지만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와 울음이 서서히 몸을 잠식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다. 어쭙잖은 위로는 그녀에게 있어서 더 상처가 된다. 하지만 뭐가 더 괜찮아질까? 그녀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아니, 그것은 바뀔 여지조차 없다.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는 영원히 ‘그’로만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에. 시노부는 덩달아 우울해진다. 바닥에 내팽겨 쳐진 스프링 장치가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기괴한 비웃음을 만드는 것 같았다. 너는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럼, 당연하지.
“눈 감아.”
시노부는 손을 들어 치시오의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당연하지 않아. 치시오는 분명, 벗어날 수 있어. 왜냐하면, 치시오는…. 당찬 아이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그렇지?
시노부. 네가 눈을 감으라 했지. 내 귀를 막으면서 그렇게 말했어. 너무 힘들어서, 이제 눈물이 나는 데에도 힘이 들어서. 계속 들고 있어야 했던 무거운 걸 내려놓으니 홀가분해졌는데, 더 무거운 게 눈에 가득차서. 홀가분해진 느낌이 너무 좋은데, 이 느낌은 허락되지 않는 거니까. 내가 느껴서는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더 말할 게 있었는데. 가라앉아버렸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숨이 헐떡여서는 욱욱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이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구나, 내 몸은.
눈앞에서 시노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필사적인 손으로 나를 움켜쥐고 꽉 안았었다. ‘눈’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감아’줘.
눈을 감았다. 눈알 안쪽 깊숙한 곳에 고여 있던 샘이 밀려나왔다. 줄기가 되어서, 뺨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입술이 스쳤다.
“괜찮아.”
진정된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한 건 시노부였다. 치시오는 가만히 시노부와 마주보고,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다가 황급히 침을 삼켰다.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서서히 돌아온다.
“…!”
아무 말 없이 온갖 몸짓을 섞어 가며 ‘나는 지금 당황했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더니, ‘우왁’하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미술실 안을 몇 바퀴 돌았다. 흠흠. 시노부는 헛기침을 하며 바닥에서 그녀의 스프링 장치를 주워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조금 놀란다. 매일같이 이걸 차고 다니는 거였구나. 바닥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로 짐작했었지만 여기에 익숙해진 그녀도 신기하다. 자신이라면 못 견디고 바로 가출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계획 없이 저지른 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진정된 것 같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치시오의 동선을 쫒아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손에 들고 있던 기계를 다시 한 번 더 들며 무게를 가늠하다가 아무 책상 중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한 번 더 치시오를 불렀다.
“치시오!”
팔을 활짝 벌렸다. 미술실을 빙글빙글 돌고 있던 치시오가 다리를 멈췄다. 시노부가 벌린 팔을 보고, 시노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시노부가 벌린 팔을 봤다. 머뭇거리다가, 달려가 폭 안긴다. 시노부의 손이 치시오의 등을 토닥였다.
“우리 멋진 도예가 씨.”
조곤조곤. 시노부의 목소리가 어두운 미술실에서 가라앉았다.
일이 있고 나서 진정은 되었다지만, 그녀의 기분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 우울해보이기도 했고, 평소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르며 교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애쓰고 있는 걸까. 그렇게 고민할 바에야 더더욱 남자처럼 다니기로 결심해버린 걸까. 시노부는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치시오를 토닥여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는 가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토닥. 토닥. 떨려오는 치시오의 말에, 시노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남자가 되어서, 검사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남자도. 검사도 싫어. 코를 훌쩍이면서 치시오는 자신을 토닥여주는 시노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시노부의 손이 멈춘다. 자신의 손에 올라온 치시오의 손 위에,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렇지 않으면 좋겠는데.”
톡. 톡. 시계초침 소리가 슬프다.
학원제가 열리는 시기가 됐다. 덤으로, 좋은 성적을 내서 모의재판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변호사 클래스의 친구인 레이와도 함께 서로 좋은 결착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글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정말 친하게 지냈었던, 좋은 선생님이셨는데. 그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이 학교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다. 물론 범인을 제외한 모두들 말이다. 불안감에 휩싸였다. 시노부가 혐의를 받아 피고인이 되고, 그 다음엔 나와 레이가 줄줄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게다가 어느 새 뿌려졌던 신문에 적힌 레이의 고백은 또 뭐고? 혼란스럽다. 자꾸만 이간질하는 것 같아서, 우리들의 우정을 시기하고 끊어내려는 것 같아서. 그까짓 고백이면 뭐 어때. 나는 충분히 응원할 수 있다고. 게다가 시노부의 결정도 존중해 줄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그녀의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정상적으로 모의재판이 끝나고 나면 지금쯤 모두와 함께 학원제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 걸까.
증언대에 섰다. 하나, 하나, 내가 했던 행동들을 말했다. 물론 조금의 거짓말도. 그런데 이상했다. 이상하리만치 이야기가 아주 옛날부터 원하던 대로 풀렸다. 쉽게 밝힐 수 없었던 문제가 시노부의 소꿉친구 변호사에 의해 풀렸다. ‘치시오. 너는….’
“….”
정말, 정말 오랜만에 또다시. 기계를 풀 일이 생겨서. 좋았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힐 수 있게 되다니. 이제 학교에서도, 부모님도 아무 말 못하겠지. 곁에서 보고 있었던 시노부는 조금 조마조마했었을진 모르겠지만, 정말. 나는 정말 홀가분했었다.
“고마워.”
언제 지어 보았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함께 법정을 나왔다. 우리 서로, 고민하고 있었구나. 나는 소리 내어서, 수줍게 웃었다. 치시오도 나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나를 안아 주었다. 다른 때보다도 더, 꽉 안아 주었다. 나도 여태까지처럼 그녀를 토닥였다. 있지, 시노부. 나 이제 남자가 아니야. 울음이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치시오는 말했다.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어.
“치시오는, 처음부터 여자였어.”
응. 맞아. 나는, 처음부터 여자야. 처음부터, 처음부터 여자였어. 헤헤, 웃다가, 계속 웃다가 그녀는 결국 내 어깨 위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치시오. 이제 괜찮아.
이제는 울음을 그치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껏 울어. 언제나 옆에 있어 줄 테니까. 토닥여 줄 테니까.
치시오는 시노부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해방감에 넘쳐서.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괜찮다는 확신에 기뻐서. 이제 부모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어서. 겨우 훌쩍임을 그치고 시노부에게서 얼굴을 떼어냈을 때엔 온통 붉어진 얼굴 때문에 조금 놀림 받았지만, 그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시노부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았다. 서로 이마를 맞댄다.
그녀와 함께,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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