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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재판
[ 카미야 키리오 X 카루마 메이 ]
메이는 달력을 슬쩍 넘겼다. 그리고 머릿속의 정보를 되새긴다. 그 날의 날씨는 맑고, 해가 지는 시간도 적당하다. 바람도 그리 많이 불지 않을 예정이라 기상은 완벽하고, 자신의 장기 출장을 생각해보았을 때 좋은 시기다. 메이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키리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키리오. 이 날, 어때?"
당연히 그녀가 허락해줄 것이라 예상했다. 여태까지는 키리오가 먼저 요청해왔고, 자신이 먼저 제안하는 건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으니까, 기뻐해주겠지. 허나 키리오의 대답은 달랐다. 커피잔을 도로 식탁 위에 내려놓고, 약간 숨을 들이쉬며 대답해온다.
"미안해요. 그 날은 다른 일이 있어서."
메이는 숨을 살짝 들이삼켰다. 방금 들은 이 말은 거절의 의미인가? 어리둥절하다. 제대로 말을 이해한 게 맞는 것인지, 키리오의 표정을 살핀다. 약간 웃고 있긴 했지만, 착잡함이 베어든 얼굴. 거절당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하지 못한 결말. 그렇게 오늘의 데이트는 찜찜하게 끝나버렸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좋지 않다. 단정지을 수 있다. 나름대로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데이트 신청은 분명 완벽했다. 하지만 왜? 왜 그녀는 요청을 거절한 걸까? 물어 볼 겨를조차 없었다. 물어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진정시키려 해도 수가 없다. 그나마 출장을 앞두고 남아 있는 사건파일의 정리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 일도 없었다면 고민에 빠져 속앓이를 더 하게 되었을 거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사건의 파일묶음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비닐에 잘 싸여진 종이를 한장씩 넘긴다. 투명한 비닐 위로 그녀의 지문이 묻어난다.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비닐과 비닐이 마찰하며 나는 작은 소리와 메이의 숨소리만이 방의 한켠에서 머물었다. 시선이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춘다. '후지미노 아사오 청부살인사건'. 키리오와 만난 계기가 된 사건이다. 다른 사건보다 더 찬찬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키리오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했었지. 진상이 밝혀지고 나서도 슬퍼했었다. 그녀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아마노 유리에, 사진 몇 장을 훑어보며 회상한다.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지.
"…."
글자를 읽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마노 유리에의 사진. 그리고 그 아래에 적혀 있는, 사망일.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짚어 보고, 달력을 본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몇 번이나 보았던 익숙한 날이다. 날씨는 맑고, 해가 지는 시간도 적당하고…. 그래, 데이트 신청할 때 짚었던 바로 그 날. 아마노 유리에의 기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물론 중요한 날이겠지. 자신이 좋아했던 옛 사람의 기일이니만큼, 챙겨야 할 거다. 알고 있다. 함께 상담을 해 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혼란스럽고, 여태 몰랐던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필이면 자신이 이 날에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것에 대해 당황감이 몰려들어 심장을 옥죄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를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전화하면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가, 한두시간 뒤에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바빠서 못 받았어.' 그걸 몇 번 반복하다가, 이제는 이 짓도 통하지 않겠다 싶어 전화를 받곤 '지금 면담이 있어서 나중에.'라 말하고 끊었다. 불편하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마주보는 것조차 힘들다. 자신이 고심해서 짜 둔 완벽한 계획은 무심한 한마디가 되어 키리오를 찔렀겠지.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자책하는 와중에, 키리오에게서 일방적인 통보가 왔다. '오늘 저녁, 만나던 시간에 그 카페에서 얘기 좀 해요'. 그녀의 감정이 문자의 텍스트에서부터 묻어나왔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그녀는 내가 왜 그녀를 이렇게 피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을까? 생각보다 더 많이 티를 내 버렸다. 마저 서류를 정리한다. 만나던 시간, 언제나 7시 반 정도. 그 카페, 검찰청 앞에서 조금만 더 가면 있는, 그리 조용하진 않지만 조명이 은은한 카페.
망설였다. 유리문의 앞에서 고민한다. 유리문을 넘어 들어갈 것인가, 이대로 돌아가버려도,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 괜찮은 건 알고 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와의 앙금이 더 깊어지고 더 이상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안되겠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을 안정시키고 회피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문을 열었다. 이대로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기에는 완벽하지 않아. 게다가, 그녀가 오늘 할 말 또한 알고 싶다. 듣고 싶었다. 자신에게 뭐라 말할지를 직접 듣기 위해, 문의 손잡이를 잡고 살짝 당긴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아니라면 그녀와 만나는 걸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었던지는 몰라도 팔에 힘이 들어간다. 문이 무겁다.
언제나 앉던 자리.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맞은편에는 이미 키리오. 그녀가 앉아 유리창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둘은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메이가 자리에 앉은 것을 본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 줄 때까지도 입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다. 아직 김이 슬슬 피어나오는 짙은 커피를 눈만 내리깔아 보다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는 키리오를 보는 메이. 무언가 결심한 것 같았다.
"왜 나를 피해요?"
허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키리오였다. 메이는 늘상 하던 대로 턱을 괴고 티스푼을 들어 커피잔에 담구었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커피를 저으면서도 계속 키리오에게의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 전에, 왜 말해주지 않았어?"
키리오는 제 손등을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이는 몸짓. 메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나에게 말해주길 싫어하는 걸까? 아마노 유리에에 대해서, 그렇게나 많이 상담을 했었는데도.
"어째서?"
메이는 재차 물었다. 키리오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운을 띄워야할지도 가늠되지 않았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는 어정쩡하다. 손톱을 깨물려다가 도로 손을 놓는다. 메이는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판단했다. 그래, 그녀는 역시 나에게 말하기 싫었던 거야. 자신이 그녀를 좋아했다고 말했던 상담 상대에게 말이지. 이제는 상담 상대가, 내가, 껄끄러워졌다는 건가? 여지껏 상담해준 내가?
"그냥 그만둬, 카미야 키리오."
"메이 씨, 잠깐…!"
"이제 더 할 말 없잖아!"
자리를 떠나려 하는 메이를 붙잡기 위해 키리오가 일어서며 손을 뻗었다. 동시에 메이가 그녀를 보고 손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그녀의 손끝에 채 식지 않은 커피잔이 걸려 쓰러진다. 액체가 날아서, 공중에 퍼졌다. 키리오가 작은 비명을 지른다. 뻗은 손에, 커피가 닿았다. 재빨리 손을 오므렸지만 절로 얼굴이 찡그러진다.
"…! 키리오!"
이렇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는데. 메이는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옆의 직원이 상황을 파악하고 가져온 생수를 부어 적셨다. 곧바로 키리오의 손에다 손수건을 감아 주고, 끌고 나왔다. 가까이에 있는 병원에서도 화상을 진료하고 있었으니, 그 곳으로 데려가면 될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분만에 응급처치를 완료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은 싸우고 있었을 텐데. 게다가 자신의 실수로 인해 그녀는 손에 화상을 입어 버렸다. 갑자기 욱해버렸던 제 성질을 탓하며 속으로 한없이 욕했다. 대충 그녀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키리오의 눈을 다시 마주볼 수 없었다.
"…먼저 가 볼게."
"그래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라 말하는 키리오가 싫었다. 제대로 생각하는 것을 대답해주지 않았고 정확히 자신의 의견을 표출해내지 않았던 키리오가 싫었다. 그래도 아직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복잡하다.
바깥의 그림자가 지는 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키리오가 병원 문을 나서고 그 뒤로 자신의 집을 향해 걷는 뒷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손에 감겨진 붕대가 유난히 희다. 골목을 돌아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직접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을까. 조금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싸운 뒤다. 이리 어정쩡한 분위기로는 오히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싸늘해질 게 뻔하다.
돌아온 집은 고요했다. 불은 전부 꺼져 있었고, 벌써 늦은 밤이다. 평소대로 옷을 갈아입곤 침대에 털썩 누웠다. 곰곰히 생각한다. 먼저 화내지 않았으면, 그녀는 차분히 나에게 말해주었을까? 사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 자기 자신이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더 화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잘 해결되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외출할 때 입은 옷에 넣어 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수많은 부재중통화가 저장된 카미야 키리오의 기록. 그 중 하나를 눌러 발신버튼을 터치했다. 그녀에게 가는 신호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심장이 비슷한 간격으로 뛰는 것만 같다. 손가락 끝까지 심박이 전해진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그녀의 전화를 너무 오랫동안 받아보지 않아서, 이제는 휴대폰에 대고 말을 하기도 어렵다. 계속, 가만히 기다렸다.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계의 음성메시지가 나온다. 이럴 줄 알았다. 처음 그녀에게 전화를 시도할 때부터 불안감은 이미 마음 속에 응어리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무시했던 그녀의 부재중 전화들. 이제는 그녀가 내가 했던 것처럼 하고 있다. 당연하지. 이건 인과응보이고, 예상하고 있었던 결과다. 그랬어야만 했다. 아직 제대로 끊지 않은 전화가 빠르고 높은 신호음으로 바뀌어 얕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재차 심호흡을 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어. 그런 짓을 했으니까. 그녀에게 소리치고, 상처를 입혔으니까. 아무리 실수라 해도 그녀의 손을 덮은 화상은 쉬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툭, 휴대폰을 바닥으로 던진다. 그래,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거다. 이제 침대에 편히 몸을 눕힌 뒤에 눈을 감고, 자고 일어나면 되는 거다. 당신의 생각을 하느라 피곤해졌으니까. 당신 때문에 저녁 늦게까지 바깥에 있었으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화가 났으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슬퍼졌으니까.
누웠다. 몸이 무겁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심호흡을 했다. 진정되지 않았다.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어떤 자세를 잡아도 불편하다. 상체를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다. 작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당신 때문에… 하나도 완벽하지 않아."
바닥에 떨어뜨렸던 휴대폰을 주워들어 부재중전화를 확인했다. 아무 것도 없다. 계속 화면을 본다.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 부재중전화가 기록되어 있는 리스트를 쭉 확인해본다. 넘어가고, 넘어가도, 키리오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기분이 이상해져서, 이번에는 메일함으로 들어간다. 키리오. 키리오. 키리오. 여전히 그녀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메이 씨. 무슨 일 있어요?', '일이 많이 바쁜가요?', '장기출장이라면서요. 왜 그걸 제일 먼저 말 안했어요.'.
그녀는 바로 어찌 된 일인지 안 것 같았다. 메이는 한없이 내려가고 있는 메시지함을 보고 있다가, 한순간 화면이 바뀔 때 휴대폰을 떨어뜨려버렸다. 카미야 키리오. 그녀의 전화가 왔다. 거부하지 않았던 걸까? 이대로 전화를 받아도 괜찮은 걸까? 전화를 받고 나서 해야 할 말과 하고싶은 말은? 고민하려 해 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일단 받아야 한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들어야만 했다. 초록색의 통화 버튼을, 엄지로 눌러 슬라이드했다.
화면의 통화시간은 0초에서 1, 2, 3으로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가만히 소리를 들었다. 간간히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무 말 없이, 그 숨소리를 들으며 둘은 침묵했다. 키리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기일 때문이예요?"
"…내가 미리 알고 있었던 부분이어야 했었는데. 미안했어."
메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키리오가 곧바로 다시 대답한다.
"당신이 그걸 몰랐다고 해서 저에게 사과할 이유가 되진 않아요."
메이가 주춤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은 온갖 심술을 부린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뭐였을까. 그녀를 피하기 시작한 건. 안일한 죄책감인가? 그녀가 좋아했었던 사람의 기일에 함께 데이트를 가자고 말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던 걸까?
"메이 씨. 잘 들어요."
키리오의 단호한 목소리. 메이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유리에에 대해서는 함께 지냈던 동료애로서라도 기일을 챙기는 것이 올바르다 판단했으며, 그 건에 대해서 왜 자신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해야 했는지 제대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더 큰 오해가 빚어진 것 같다고. 그리고 아마노 유리에는 분명 자신이 매우 좋아했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으로써는 아니라고. 여기에 대해서는 자신 또한 아직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방금 전의 카페에서도 할 말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아 당신의 화를 더 돋구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키리오. 미안한 건 나잖아."
"둘 다예요."
메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을 본다. 방금 전에 갔었던 병원이 보이고. 검찰청이 보이고, 아직 폐점하지 않은 카페의 불빛이 어스름히 보인다. 긴 죄책감이 방금 전에 터졌다. 미안했다. 아직 어린 마음에 많은 실수를 겹쳐 그녀에게 퍼부어버렸다. 커튼의 천을 꽉 붙잡았다.
"메이 씨. 할 말이 있는데. 혹시 내려와줄 수 있어요?"
"…집 앞에 있어?"
"당신이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었으니까. 나는 전화를 기다렸어요."
창문을 내려다본다. 키리오가 창문으로 보이는 메이의 얼굴을 보고 살풋 웃었다. 황급히 외투만을 걸쳐 입고 문을 나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형체가 보이고, 색이 보인다. 눈 앞에 서서, 그녀가 맞는지를 확인했다.
"키리오…."
"금방 왔네요, 메이 씨."
메이는 마저 달려가기를 주저했다. 그녀의 가까이에 가서도,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키리오에게 했던 말이 되살아나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우물쭈물거리는 것이 이상하게도 눈에 띄자, 키리오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메이는 쳐내지 않았다.
"손은 괜찮아?"
"약한 화상이니까, 금방 나을 거예요."
"…. 왜 왔어."
"지금 말하려고 하는 걸, 전화로 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메이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서야 눈을 부드럽게 마주쳤다. 키리오의 얼굴에 약간 그림자가 졌지만, 눈동자가 가로등에 비추어 져 살짝 빛났다. 메이는 자신의 손을 잡은 키리오의 손을 흘끔 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같이, 유리에 씨의 기일을 챙겨 주러 갔으면 좋겠어요."
"기일을…?"
"끝나면, 같이 밥도 먹고요. 모처럼 신청해주셨잖아요. 먼저."
메이는 키리오의 손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심한 짓을 하고, 속으로 욕했으며, 심지어는 네 전화도 며칠간 받지 않았었잖아. 곧바로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한동안 손만 잡아둔 채 대답하지 않는 메이를 보고, 키리오는 그녀를 다독였다.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토닥였다. 어깨에 닿는 손에 놀랐지만, 메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가 자신에게 물었다. 함께 가자고.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함께 갈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좋아."
키리오는 방금 전 자신의 얼굴을 아래서 봤던 것처럼 미소지었다. 메이의 손 하나에, 키리오의 손 두 개가 겹쳐 포개어진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나를 이렇게 바꾸어 준, 그런 사람과 함께 간다면. 그녀도 좋아해주겠지.
둘은, 그렇게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밤이 점점 더 깊어간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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