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안개] 우천(雨天)

자캐 2018. 9. 22. 21:58

  공원은 한적했다. 사람도 거의 없었고, 어둑해지는 시간이니만큼 유입되는 보행자도 별로 없었다. 깜빡, 깜빡, 하며 가로등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켜진다. 그 불빛에 그림자가 지는 나무들. 잘 닦인 산책로에는 어둠과 빛이 아련하게 섞여 마치 흐릿해보이는 시야가 연출되고 있었다. 몬트 왓슨은 여전히 아릿한 몸을 이끌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본디 불편했던 다리 한 쪽을 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짝 어긋나는 발소리. 깊게 숨을 들이쉬며 공기를 만끽했다. 폐에서부터 기도로 빠져나가는 숨이 기분 좋게 귓속을 간질이고 있을 무렵이던가. 다른 이명이 퍼지듯 나긋한 목소리가 공원을 가로질렀다.

  "오랜만이예요. 왓슨 씨."

  왓슨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여지껏 직장에서… 부득이하게 함께 했었던 교수. 제임스 모건. 국장에게서도 이미 지켜보라는 지시를 받았었으며, 뒷조사까지도 한 번 해 보았던 자. 하지만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 역시도 익숙한 사람. 그러니까….

  "이 사람과는… 구면이죠?"

  왓슨은 걸어나가던 발을 뒤로 조금 옮겼다. 제임스는 제 옆에 서 있는 로덴 헤이즈를 한 번 가리켰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들었어요."

  살짝 웃어보이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해보였다.

  "대단하군요. 다행이예요."

  무척 상냥한 어투였지만.

  "……그러세요?"

  그 자의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한 발자국 더 뒤로 딛었고.

  "대체 누가 그런 몹쓸 짓을 했을까요?"

  "…당신이 시켰잖아."

  결국 그 말이 터져나왔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의 안경 너머로 옅게 웃는 눈매가 비추어진다.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

  "제가 말인가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선선히 젓는 그의 얼굴이 로덴을 향했고. 입술이 움직인다.

  "직접, 하겠다고 했지요?"

  "……예. 그랬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왓슨의 표정은 어땠을까. 아마도 '망연자실하다'고 평가했을 지도 모른다. 뒷걸음질치는 다리가 떨려오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른 가지 않고 무엇하나요?"

  제임스 모건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둘 다에게 이야기하는 거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몬트 왓슨은 뛰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금세 숨이 찼던가? 느낄 새도 없이. 멀리 가지 않아 붙잡힌 어깨. 밀려 넘어지는 몸. 등에 박히는 묵직한 감각. 그리고, 쓰러진 등 위로 올라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로덴 헤이즈.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반사적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온전히 그에게로 전해져온다. 로덴은 가볍게 나이프를 꺼내어, 왓슨의 얼굴 옆 바닥에 내리꽂았다. 둔탁한 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서늘하게 울렸다.

  "몬트 왓슨 군의관."

  그는 계속 일어나려 드는 몸을 꽉 눌러, 고정했다. 여전히 떨고 있다.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남아 있나?"

  로덴은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과거의 일은 분명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랑스럽다는 게 괴로웠다. 그래서 잊고 싶었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ㅁ, 미안,… 미안… 해요… 잘못, 했어요……."

  느껴지던 떨리는 몸이 이제는 불규칙적이었다.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제 아래의 전우는 급기야 눈물을 터뜨려버렸다. 거칠개 내쉬는 숨에 울음이 뒤섞여온다.

  "…내가, 내가… 내가… 그랬어…."

  로덴은 가만히 왓슨을 바라보았다.

  "내가… 로덴씨를… 죽였어…."

  나이프를 박은 손이 아닌, 다른 손을 꺼내었고.

  "내가… 그, 랬어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내가…."

  "…그래."

  점점 더 목메인 목소리가 이제는 끊겨서, 울음을 삼키는 소리만이 아래에서 울렸다.

  "자네가 군인인 나를 죽였지."

  자연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상냥함은 아니었다. 습관. 아주 오래 된 습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전장에서의 습관.

  "자, 어떤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그 날 내가 살렸던 자네의 목숨을, 되돌려받는 것은."

  눈물은 계속해서 더 흐르고 있었다. 옛 생각이 끊임없이 더 흐른다. 참아야 했다. 생각을 참지 않으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계속 닦아주었다. 생각난다. 닦았다. 생각난다.

  "그 날 자네 우는 소리가,"

  결국은

  "그렇게 듣기 싫은 적은 처음이었지."

  입 밖에 생각을 내어버렸고.

  나이프를 뽑아내어, 목에 가져다대려는 순간. 왓슨은 빠르게 손에 움켜쥔 것을 로덴의 눈을 향해 던졌다. 평범한 흙.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 나는…"

  아직 그치지 못한 울음을 삼키며 왓슨은 로덴을 밀쳐내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의… 전적에… 살인을, …남겨주긴 …싫어요."

  "…몬트 왓슨…!!"

  신경질적으로 왓슨의 이름을 부르며, 로덴은 흙을 털어내려는 듯 눈가를 긁어대었다. 뒤에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제임스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는.

  "로덴 헤이즈 당신은!"

  이 사람을.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길로 빠지게 만들었나.

  "그러기 싫단 말이야……."

  고였던 눈물이 다시 터져 볼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로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춘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가락. 입을 한 번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입을 열어서.

  "…아직도?"

  왓슨은 그저 울었다.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하지 못했다.

  "……왜 자네는 끝까지 나를 괴롭게 만들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잖아!"

  왓슨은 다시금 뒷걸음질쳤다.

  "…대답하라, 몬트 왓슨 군의관."

  눈 앞의 사람이 없어지면,

  "자네는 나를 잊었지 않았나?"

  기억을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교수가 되어 사회에 녹아들지 않았나?"

  추억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평범히 살지 않았던가?"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망쳤다.

  왓슨은 도망쳤다.

  무엇에서였는지는 몰랐다. 질책? 두려움? 아니라면 과거 그 자체에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왓슨은 그저 숨죽여 울었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들킨다면 정말로 죽겠지.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로덴은 나이프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향해 던져버린 모양이었다.


  "왜."

  벽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아직도 나를 존경한다고,"

  아주 조금 떨려서.

  "말할 수 있느냔 말이야…."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지만,

  이미 온 몸이 슬픔에 젖어 있었으리라.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우주 100일 콘티....  (0) 2018.12.30
[태양숲] 50일의 그날  (0) 2018.10.03
[태양숲]거짓 진주로 말미암아  (0) 2018.09.15
[타카타다] 남김없이  (0) 2018.06.22
[미셸한결] Satisfy  (0) 2018.05.05
Posted by MD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