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키다] 황색 말

그 외 2016. 1. 22. 00:19

*Commission From @vndkvn_nin MD세



< 듀라라라!! >

[ 오리하라 이자야 X 키다 마사오미 ] [이자키다]




황색 말







거리를 걷고 있으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멀리 바닥을 보며 발을 내딛을 때 무심코 보이는 신기한 현상. 특히 나뭇잎이 많이 떨어지는 가을에 드문드문 보이는 바람의 회오리.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던 키다 마사오미는 바람에 의해 한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낙엽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중심으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의 낙엽과 부딪히면서도 계속 한 자리만을 고수하는 융통성 없는 모습. 저렇게 돌고 돌다가 원심력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자빠지는 건 누구일까.


"…아."


도로의 차가 슬슬 정지선으로 멈추는 순간, 그는 무심코 탄성을 질렀다. 전혀 찢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모양이 남아 있는 나뭇잎 하나가 원에서 벗어나 그대로 달아나버리는 탈주를 눈에 담았다. 이리저리 찢어지고 뒤엉킨 불쌍한 나뭇잎들만 계속 돌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저 소용돌이는 분명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접해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을 조종하는 태풍의 눈이 존재하고 있겠지. 그렇게 고뇌하며 키다는 초록색으로 바뀐 횡단보도 신호 속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수차례 입속에서 녹아가는 막대사탕처럼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이케부쿠로. 하지만 그 끝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허전한 막대 하나와 아른하게 감돌고 있는 단내. 그래, 여기는 그렇게 확실히 변해가고 있었다. 1년 정도 눈을 떼고 있었다면 '여기 뭐가 있었어?'라고 되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남아있는 '단내'의 흔적, 그러니까 분명히 뭔가 있었음에도 사라진 채 보이지 않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존재의 사실'만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 단내가 남아있는 원인이 뭔가 하고 생각해본다면, 키다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단내가 난다는 건 그걸 풍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라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은가? 장난이 아니다. 키다는 그렇게 속으로 자문자답하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케부쿠로, 이 거리에는 그런 사람들이 상당수 많았으니까. 복잡한 거리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딱히 주목받지 못하는 데다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몇 년이고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니 말이다.


"이자야 씨."


물론 앞에서 언급했던 단내를 풍기는 자는 그가 무심코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막대사탕을 녹이긴 커녕 씹어먹을 남자야. 지독한 단내. 걷고 있던 다리를 중간에서 멈추어 조용히 그자의 이름을 중얼거리기만 했음에도 골목 속의 그림자가 반응해 나왔다. 눈을 내리깔고 그림자가 내는 소리만을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몇 발자국 이내로 들어왔을 때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털코트. 얼굴만 알고 있는 관계자의 말을 빌리자면 '호스트'같은 외모. 거기에서 나오는 꽤 느긋하고 간질간질한 목소리. 물밑에서 유명한 오리하라 이자야.


"오늘은 산책? 별일이네."


그 산뜻한 목소리에 섬뜩 소름이 돋았다. 그 고동색 동공이 빠르게 자신의 몸을 읽어내듯 훑자 경멸스러운 느낌이 몸을 둘둘 감아와 뇌를 착 가라앉혔다. 키다는 목에서 맴도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이제 슬슬 지겨워질 참이다. 이 말도. 그도. 자신의 눈앞에서만 썩어가는 듯이 보이는 이 거리도.


"언제쯤 죽을 건가요?"

"키다 군이 영원한 산책을 끝내기 전까지?"


이자야는 요새 유행하는 유머라도 들은 것처럼 살짝 소리 내 웃었다. 영원한 산책.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의미도 없고 의중도 모르겠다. 게다가 질문에 의문형의 대답이라. 키다는 눈을 치켜뜨며 이자야를 째려보았다. 제발 시야에서 사라져 주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벌레 이전으로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을 고른다면 그는 필시 이자야를 고를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아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난 널 따라온 게 아니야."

"…그러면?"

"우연이지. 이 거리가 가져다 준."


쓰레기.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키다는 못 들은 체 하며 몸의 진행방향을 돌렸다. 조금 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목적지까지는 돌아서 가도 괜찮으니 제발 이 인간이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깊숙히서 혐오감을 끌어냈다.


"뭐가 그리 급해?"


우뚝. 발을 멈췄다. 익히 들은 상냥한 말투. 하지만 전혀 상냥한 마음이라고는 없는 립서비스. 그는 이런 말투를 자주 썼다. 누군가를 회유하거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거나, 자신의 기분이 좋을 때. 키다는 그런 말투를 견딜 수 없었다. 그때의 일이 자꾸만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져 뇌 속에서 비명이 마구 울려퍼진다. 뚜, 뚜. 연결되지 않는 휴대폰의 신호음이 비명과 함께 머릿속을 헤집었다. 환청이야, 이건.


"내가 알려줄까?"


가슴이 철렁했다. 이자야의 뒷말이 그의 심장을 푹 삼켜 날카로운 이빨로 씹어먹는 것만 같다. 그렇게 씹어먹힌 심장이 쿵쾅거리며 고동쳤다. 분명 어디에서도 말한 적이 없었을 거다. 자신이 뭘 고민하고 있는지를. 그 친한 친구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인터넷의 고민의 방 같은 곳에도 써 갈긴 적이 없다.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만 키다는 그의 말에 동요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고,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입에 고인 침을 목으로 넘기며 키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곁눈질로 본 이자야의 눈매가 마음에 드는 반응이라는 듯 휘어진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가면 될 걸, 굳이 부른 이유는 뭐야."


그러고 보니 그랬다. 키다 마사오미는 양옆에 붙인 주먹을 꽉 쥐며 숨을 들이켰다. 오리하라 이자야가 그 골목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바로 이름을 불렀다. 조용히 불러도 그가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줄 것이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어째서지? 그를 보고 싶었던 건가? 하고 한순간 생각하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가로막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에게 물어보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는다면 모든 게 잘 풀릴 거야. 그가 하라는 대로 한다면 그게 곧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거야.

숨이 턱 막혔다. 얼음으로 덮인 과속방지턱을 억지로 넘어가려던 트럭이 뒤로 스르륵 미끄러지는 걸 본 적이 있나? 바로 뒤에 있는 차에 부딪혀 분명히 큰 사고가 날 게 뻔한 상황. 지금이 그랬다. 키다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또다시 그때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겨우 머릿속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생각하며 키다는 이자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응? 대답."


그리고 그 브레이크는 착각이라는 걸 눈치챘다. 생각이 빗나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버렸다. 이자야의 웃는 얼굴. 공적인 만남에서라면 항상 볼 수 있는 수려한 미남의 페이스. 동시에 그 웃음은 단단한 사슬을 뽑아내어, 대면하는 사람의 다리를 옭아매 붙잡기에 충분했다. 키다는 말없이, 한참 동안 이자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채팅할 때처럼 마음껏 죽으라 외치고 싶은데도 안 된다.


"…됐으니까, 이만 갈 길 갑니다."

"그래, 그럼 연락할게?"

"…."


마치 다음 주에 만날 약속을 잡은 친구마냥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러났다. 보통 이럴 때는 그 간드러진 목소리로 집요하게 따라왔었을 텐데. 위화감이 들었다. 평소라기보다는 거의 생활패턴이라 해도 다름없는 그 방식이 아니었다. 그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두었던 리스트가 한순간 새하얀 백지로 변했다. 혹시 오늘 시즈오라도 만나고 온 건가 싶어 확인해봤지만, 별달리 상처나 힘든 기색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시즈오가 날뛴 흔적이나 시끌시끌한 관중들도 보이지 않고.


"…착각일까나."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 거겠지. 키다는 발에 채는 작은 돌멩이를 신발코로 툭툭 차며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이자야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내가 알려줄까?'하고 발랄하게 물어왔던 그 말에 몸이 움찔거리도록 찔렸다는 게 짜증 났다. 그리고 사실 목적지는 없다. 그런 건 구실일 뿐이다. 정해두지 않은 종착점은 걷고 걷다가 확인하면 더 멀리 뻗어 나가 있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그 끝은 도대체 어디인지, 정해둔 자신조차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자야, 그는 그냥 지나가는 길에 지나가는 말로 자신을 희롱했을 뿐이다. 기분 나쁜 장난이지 않은가.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딜 가나 으슥하고 익숙한 골목이다. 상자가 옮겨지고, 환풍기가 낡아졌거나 먼지가 쌓인 채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다는 것만 뺀다면 몇 년 전과도 똑같은 풍경이겠지. 키다는 그림자를 밟으며 골목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모르는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릴 적에 좀 더 얌전하게 지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후회해도 늦었다.

바닥이 축축하다. 어제 왔던 비가 아직도 마르지 않은 건가? 아니다. 건물의 배수구에서 흘러나온 물이다. 저 물도 조금 전에는 잘 쓰이고 있었겠지. 그리고 내팽개쳐졌겠지. 분명 방금 전에는 보금자리에서 싱크대 같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을 거야. 자의로 나왔을 리가 없지. 키다는 '보금자리'라는 단어에 애착을 느꼈다. 곧 있으면 돌아갈 보금자리. 어디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리라. 그런데 그곳이 어디지? 하늘에 있는 해는 보이지 않는다. 높은 건물에 가려져 그림자만 무성하게 드리어진 이곳에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손목시계와 휴대폰의 배경화면 정도겠지. 키다는 혀를 쯧 차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음?"


전화가 왔었다. 방해받지 않고 싶어서였는지 무음으로 해 두고는 그 새 까먹었다. 버튼을 조작해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다. 곧이어 뜨는 익숙한 넘버.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몇 시간 전의 그가 말했던 대로, 휴대폰의 화면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 분명히 이건 오리하라 이자야, 그 사람의 것이다. 그 사건이 지난 뒤 몇 년이나 지났더라? 고민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기억나고 있으니까. 그의 인생 최악의 그래프에서 정점을 찍은 날. 그런데도 이렇게 뇌리에 확실히 박힌 걸 보면 어지간히 당했음에도 그를 기억에서 지우기 싫은 거겠지.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솟아난다. 그가 보통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하는 편이었나? 사건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가 그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항상 자신이 먼저 연락했다. 막힐 때마다 그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몇 번이고 발신버튼을 눌렀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랬다. 수신은 거의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일단 또 전화가 올 수 있으니 무음 설정을 풀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자신의 친구에게서 문자가 날아올지도 모르고, 광고전화나, 권유전화 같은 게 올 수도 있으며, 자신이 오래전에 헌팅하며 건네준 번호로 연락하는 누님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키다는 평소와 같은 의식의 흐름을 조정해 멋대로 생각하며 휴대폰의 설정 톱니바퀴를 눌렀다. 그리고 멈칫한다.


"…? 무음이 아니잖아?"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전화와 문자음은 모두 초록색 'on'버튼에 고정되어있었다. 한참 동안 그 버튼을 뚫어져라 본다. 방금 버튼을 누르면서 잘못 누른 건가? 신중하게 눌렀으니 그러진 않았다. 그렇다면 걸으면서 수신음을 듣지 못했던 건가? 아니다. 시간을 보니 불과 몇 십 분 전에 온 전화다. 혼자 말하기엔 쑥스럽지만 자신은 한 시간 전부터 골목 속에서 고독을 즐기고 있었으니 휴대폰의 알림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연락할게'라고 말한 뒤 바로 진짜 연락하다니. 오히려 그는 미리 언질을 준 다음 그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쳐 직접 전화하게 만드는 게 좀 더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이건 그거다. 타이밍을 맞춰서, 발신은 가지만 수신음은 들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수신을 받고 음을 울리기까지의 단 몇 초 동안을 계산해서 부재중만 남긴 거다.


"이거 참…."


역시 쓸데없는 곳에 머리를 잘 쓰는 사내다. 키다는 통화기록 버튼을 누른 뒤, 자동으로 저장되어있는 부재중 전화 메모를 부서뜨릴 듯이 꽉 눌러 삭제시켰다. 화면에서 급하게 축소하며 펑 소리를 낼 것처럼 사라지는 부재중 전화 메모. 저 전화번호는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는 초파리라도 화면에 내려앉았다는 듯이 휴대폰을 툭툭 털어내고 옷소매로 화면을 닦았다.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그의 휴대폰은 분명 여러 개일 텐데. 그동안 바꾼 휴대폰도 많을 거고. 보통 그의 직업상 번호를 자주 바꾸어야 하지 않나? 어째서 이 번호를… 아직도. 몇 년이나 세탁되지 않은 이 번호를. 자신의 뇌리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숫자 몇 개를 소유하고 있는 거지? 키다는 휴대폰의 키패드를 올려 숫자 몇 개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터치했다. 이거 봐, 손에도 이미 익어 있어. 당신에게 얼마나 전화했었는지 몰라. 이 손가락으로. 지금보다 더 여린 손가락으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타게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그리고 지금 다시, 키다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에게 항의하고 싶어서 버튼을 눌렀다. 그가 버린 전화번호가 우연히 이 휴대폰으로 다시 들어온 거라면, 그렇게 혼선이 빚어져 모르는 사람이 잘못 건 전화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제발 그와는 관련이 없는 번호이길 바랐다. 원하고 원했다. 모르는 사람이 받아라. 몇 년 동안 자신을 괴롭힌 자가 가졌던 번호를 이번에는 부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길.


"…."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렸다. 그리고 툭, 끊긴다. 하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어릴 때 장난삼아 걸어 봤던 무서운 이야기를 알려주는 전화번호 같은 느낌에 키다는 소름이 돋아나는 팔을 다른 쪽 손으로 살짝 쓸며 귀를 기울였다. 고요하게 공기가 울리는 소리. 그 사이로 휴대폰을 고쳐 드는 소리가 살짝 난다. 딸각.


"…이자야 씨."

"네에. 오리하라 이자야입니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키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찜찜한 그 몇 초간의 텀이 그에게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왜 금방 대답하지 않은 건가.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자야는 조용히 웃음소리를 냈다.


"지금 왜 대답을 늦게 한 거냐고 물어보고 싶지?"

"…!"


정곡이다. 키다는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고 대답하며 응수해주려고 했다. 입술을 떼는 순간, 톡톡. 하고 휴대폰의 몸체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난다. 키다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네가 내 번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서야."

"쓸데없네요. 그래서 연락은 왜 한 건가요?"

"딱히 볼일은 없어. 그냥 확인했을 뿐."


짜증 난다. 구린내가 휴대폰 너머까지 풍긴다. 이를 바득 갈며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키다는 그에 대해 약간의 무서움을 품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막연한 무서움.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자신에게는 머나먼 존재다.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영향력도 모든 것이 자신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론 이 사람만의 재주일지도 모르지만, 키다는 이자야를 경멸하면서 존경했다.


"이참에 여기로 와 볼래? 마침 좋은 심부름이 하나 있어."

"…네."


거역할 수 없다. 이자야에게 반발심을 드러내고 반기를 들었지만, 꾸역꾸역 그의 잔심부름을 도왔다. 이래서야 '반기를 들었다'는 말도 부끄러울 정도. '반항'은 허울 좋은 말이 되었다. '발버둥'이라고 하는 편이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이겠지. 키다는 발버둥 쳤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도 아니고,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도 아니었다. 마음속에서의 그의 존재에서부터 떨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달아나기는 싫다. 붙어있기도 싫다.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건가. 그의 존재가, 마음속에서? 조용히 독백하며 키다는 이자야의 그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지도 없이 한걸음에 찾아온 그의 사무실 겸 집 앞은 깔끔하다. 광고용지도 붙어있지 않고 그 광고 흔적의 테이프 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은, 마치 새것 같은 철문.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어 확인 차 딩동, 하고 초인종을 누르니 몇 초 뒤 체인을 푸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열린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것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여전히 새까맣게 입고 있는 오리하라 이자야.


"전화로 말씀하시면 되는 걸 뭐하러 부르셨나요."

"글쎄. 들어와서 한 번 맞춰봐."


이자야가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만 문틈을 만들었다. 키다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잡아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기분 나쁜 장소야. 얼른 할 말이나 듣고 빠져나와야지. 이자야는 어느새 춤추듯 짙은 와인색의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의자에 풀썩 앉았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움직임이어서 키다는 그 행동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자야가 그를 흘깃 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양손의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 끼운다.


"편하게 앉으렴."


가늘게 뜬 눈이 키다의 몸을 꿰뚫었다.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키다는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소파의 양옆 툭 튀어나온 부분에 손바닥을 접한 채로 초조한 듯 손가락을 두드렸다. 도로도 그리 멀지 않은데,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옆집의 TV 잡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한 공기가 가라앉았다. 언제쯤 말을 꺼낼까 싶어 옅게 코로 숨을 내쉴 때였다.


"키다 군."

"…?"

"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해. 알고 있지?"

"그게 당신의 살아가는 의미 아닙니까?"


경멸 섞인 눈초리를 한없이 그에게 보내며 끔찍하다는 티를 냈다. 그래도 이게 몇 년째인가. 인정해줘야지. 그의 삶의 이유이자 가장 즐거워하는 주제인 '인간'에 그 자신도 속해 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래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싶어지지."

"그건 그렇죠."

"키다 군, 너한테까지도 미치는 영향이야."

"…."

"알겠어?"


이런 말을 듣기 위해서 여기에 들어온 건가? 키다는 자신도 모르게 턱받침을 하고 있다가 주륵 미끄러졌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몹시 심장이 뛰었다. 사랑이라? 그게 나에게까지 포함되는 것인가? 손가락이 약하게 떨렸다. 역겨워. 참으로 역겹다. 그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키다는 알고 있다.


"그래서, 심부름은요?"

"사실 벌써 메일로 보내 뒀지."

"…."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그의 행동. 쓸데없이 오라 가라. 문자로 해도 되는 말을 말로 하러 온다든가, 말로 해야 하는 것을 굳이 문자로 보내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재능은 탁월하다. 그 선을 잘 이용해 사람을, 인간을 쥐락펴락하는 재주는 높이 사고 있지만 역시 직접 당하는 건 속이 울렁거린다. 그를 앞에 두고 얼굴을 살피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구는 게 보기 싫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데에 메스꺼운 느낌이 곧잘 난다.


"그래서.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소년."


그렇다. 그는 뭐든지 다 알았다. 정보통이라는 멋들어진 직업에 걸맞게 사사건건 사소한 일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키다는 간과했다. 그가 자신이 가고 싶어하는 곳에 대한 것을 절대로 모를 거라고 단언해버렸었다. 잘못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 반복하지만 다 알고 있다. 그는, 중학교 때의 자신을 저버린 그 만악의 근원이었으므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패턴을 분석하는 걸로도 모자라 자잘하게 쪼아진 감정까지도, 속 깊숙하게 넣어 둔 무의식까지도 한올한올 가볍게 손가락으로 건드려댔다.


"할 말 없어요. 이만 갑니다."


키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손잡이를 잡아 꺾었다. 순간적으로 붉게 보인 그의 눈동자가 살을 에워싸듯 스쳐 지나간 탓이다. 등 뒤에서 그가 소리 낮춰 웃는 목소리가 울렸다. 상관 않고 키다는 힘껏 문을 닫았다. 위협적으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달리 경쾌하게 닫힌 문은 키다의 마음을 짓눌렀다. 고민이라니.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씩씩대며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건물 바깥이니, 일단 바람이나 좀 쐬며 기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지.

몇 걸음 내려가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려 퍼져서 키다는 황급히 버튼을 눌렀다. 뒤늦게 화면을 살펴보자, 익숙한 번호다.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 그의 사무소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애초에 이곳 자체로 돌아오기 싫었다.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꾸 돌아왔다.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길은 한 가지뿐. 그 한 가지 길을 걷다 보면 자꾸 제자리걸음이다. 갑자기 오늘 낮에 보았던 원형의 낙엽회오리가 생각난다. 그 원형의 길 중심에는 오리하라 이자야가 있고, 자신이 그걸 맴돌고 있는 게 아닐까. 바깥을 빠져나갈 수 없다면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책. 그래서 키다는 이자야를 싫어한다 말하면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리 의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 내 말은 다 안 끝났는데."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떠날 수 없다. 이자야의 말을 듣자마자 키다는 깨달았다. 그를 떠나 있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없으면 자신은 간단한 심부름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집착했었다. 그 날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 지금도 마음 깊숙이서. 하지만 그는 사무적인 눈길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놀리는 건가, 자신을 이렇게 매달리게 만들었다면 다정한 말 한 번 정도는 건네주어도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언제나 여유롭게 차나 커피를 마시며 목소리만 알고 있는 상대방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할 뿐이다. 죽어, 죽어. 되새기지만 키다는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 그가 없어도 나는 살 수 있어. 아니야, 그럴 리가. 나는 그가 없다면… 모르겠다. 이제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의 소름 돋을 정도로 냉담한 목소리는 그때의 일을 또 생각나게 만들어서, 다시 머릿속의 비명을 깨웠다.


"상관없어요."

"응?"

"당신 손에 놀아나고 이미 버려졌다면, 더 이상 신경 써 주지 말란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날아갔다. 했던 말을 더듬어보면 어순도 이상해졌다. 억지로 짜낸 거짓말투성이 한 마디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나한테 신경 좀 써 달라고. 역으로 정리하자면 그런 말이었다.


"키다 군. 날 좋아해?"


억하심정이 무너지듯 그의 한마디에 정신이 유리처럼 산산조각났다. 키다는 계속 침묵하며 그 정신의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주워담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째서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리고 왜 그는 나의 이런 말에 저 대답을 한 걸까? 얼버무리려는 건가? 저 말로 인해 내가 자신에게 태클이라도 걸 거라고 생각했나? 한참 동안 추슬렀다. 어안이 벙벙하다. 달싹거리는 입술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럴 리 없잖아요. 하루종일 죽으라는 소리만 들어서 뭔가 나사라도 빠졌습니까?"


그럼 좀 죽어. 죽지그래. 제발, 제발 죽어! 죽으라고! 키다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혐오감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왔다. 많이 느꼈던 감정이지만, 이건 익숙하지 않다. 그래, 이번에는 이자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다.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것이 자신을 타고 올라와 구역질을 뿜어댔다. 어째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지? 왜 아니라고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인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이자야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작게 소리죽여 키득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이 한 말에 타격을 받은 키다 마사오미를 향해.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너에게 있어선 다행이네. 나를 좋아한다면 좀 더 특별한 말을 맡길 예정이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그는 이미 말이었다. 이자야의 꽁무니를 잡고 돌아다니며 온갖 진흙을 몸에 씌운 채 씻지도 못하는 말. 그렇다. 그는 언제까지나 그의 '말'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짓밟혔다. 감정이 한없이 짓밟히고 찢겨나간다. 사람이 분노에 치달으면 동공이 흔들린다는 게 이런 거였나. 키다는 휴대폰을 있는 힘껏 쥐어 바닥으로 던졌다. 그렇게 계단 끝까지 내려가 버린 휴대폰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내려가 주웠다.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 나의 감정까지도.

항상 말했지만, 당신은 최악이야.


그 익숙하고 변치 않는 정론이 가슴 속 깊숙한 곳을 꿰뚫었다.


"되어 줄게요. 당신의 말."


이미 그의 안으로 들어간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부서져버린 휴대폰 속에서 이자야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어서 와."






Fin.

Posted by MD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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