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커미션은 파이널판타지14 '창천의 이슈가르드' 에피소드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기로(岐路)















*Commission

for @Matsuru_FF

from @vndkvn

루티브린(나이트) X 루티브린(학자)






1


  “나이트 씨. 일어났어요?”

  달그락거리며 찻잔과 받침 접시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이트를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는 아침. 불어오는 바람은 익숙한 요정의 날갯짓이었을까. 천천히 뜬 눈을 굴리며 학자를 곁눈질 한 그는, 이제 막 해가 뜬 이른 시간을 즐겼다. 자신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언제였던가. 체감 상으론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기분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평을 주위에서 곧잘 듣곤 했다. 물론 학자 쪽이 가장 먼저 에오르제아에 존재했고 뒤이어 나이트가 생겨났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정확히는 ‘타인.’ 굳이 표현하자면 그랬다. 둘은 생김새만 똑같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타인이었다.

  나이트는 몸을 일으키며 서서히 허리를 폈다. 햇빛에 비추어진 그림자가 이불에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은은한 차의 향이 감돌아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신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신 겁니까? 학자님.”

  바닥에 깔아 둔 이불을 정리하며 나이트는 학자를 살폈다. 오늘도 달리 일은 없었던 듯 평온한 상태다. 그가 평소에 먹던 약을 쏟았을 땐 단숨에 달려왔었지. 그 이후로 이렇게 같은 방을 쓰게 된 거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꽤 괜찮은 계기였다. 학자는 그에게 있어 많지 않은 편안한 상대 중 한명이었으니까.

  “물론, 오늘도 의뢰가 있으니까요. 얼른 준비해야죠? 자, 여기 의뢰서예요.”

  식탁 위에 차와 의뢰서를 사뿐히 두며 학자는 선하게 웃었다, ‘의뢰라, 다들 끊임없군.’하고 속으로나마 불평해보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는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니드호그를 토벌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는 중이기도 했었고 겸사겸사 다른 모험가들에게 사기를 돋구어주기도 하는 등 자잘한 할 일이 많았다. 이런 생활을 지내기 전에는 상당히 어두운 시기를 모두가 보내 왔기 때문에, 일부 단체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죽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제 쪽으로 마음을 돌리라는 이단들이 군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쫒기거나 잡혀가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보았던가. 마른 목을 차로 축이며 나이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번 의뢰는… 간단히 줄이자면 졸개 처리인 게 맞습니까?”

  나이트는 쓸데없이 긴 문장이 이어지는 의뢰서를 읽다 말고는 안대를 고쳐 썼다. 전략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결국 원하는 건 그쪽 길목이 불안해 사람들이 잘 다닐 수가 없으니 나름대로의 토벌을 부탁한다는 게 아닌가. 다른 변명도 많아 보이지만 그만큼 일을 해결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표시겠지. 물론 그들은 사람을 돕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니 이것저것 살을 붙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도와 달라 한다면 그게 제일 간편하고 좋은 방법이건만. 가방에 물약과 선약을 묵묵히 챙기던 학자는 가볍게 웃으며 나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도 근처에 가끔 커다란 드래곤이 출몰하기도 한다니까요.”

  “흠. 그렇습니까.”

  나이트는 의뢰서를 돌돌 말아 가방에 집어넣으며 수긍했다. 위험한 곳이라 소문난 길목이라면 부탁할 때 빙빙 돌려 말하며 조심하는 태도도 어쩔 수 없는 방어기제겠지. 그들의 행동은 이해될 만도 하다. 근처에  가방을 들어 올리며 둘은 가볍게 여관을 나섰다. 장소는 커르다스에서 조금 먼, 구름바다 부근.

  ‘별 일 없겠지.’

  서로 그런 생각을 한 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1.5


  눈앞이 붉었다. 따뜻한 액체가 그의 몸에 닿았다가, 급격히 식었다. 축축하고 찝찝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음과 동시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는다.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가는 시야. 먼지에 가득 찬 공기를 들이마신 목 안쪽이 따가웠다. 이명이 귓속을 맴돈다. 계속 머릿속이 울리고 있었다.

  “…나이트 씨?”

  학자는 작게 속삭였다. 분명 제 앞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었는데. 제 몸으로 덮쳐온 것은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아니었다. 몸에서 통증은 밀려오지 않았다. 의문을 느끼고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동자 속에 꽉 찬 것은, 바위에 갈리고 갈려 울퉁불퉁한 커다란 발톱. 나이트의 등에서 솟아올라 있는, 휴런의 몸통만한 발톱. 그리고 그의 얼굴만 한 데굴거리는 눈동자. 드래곤은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저의 구역을 침범한 자를 땅으로 집어던졌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학자가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그를 받아냈다.

  “나이트…!”

  쓰러진 그를 지켜보던 학자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가 이어졌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피. 힘없이 쓰러져 안기는 그.

  “학자, 님….”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조용히 눈을 감는.

  그 사람을 눈에 담으며.


  학자는 구역 일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2


  ‘눈꺼풀이 무거워.’

  정신이 들었을 때 나이트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귀에 신경을 모아 보면 고요한 주위. 바람 소리 한 점 들리지 않고, 벌레 날아다니는 소리조차 없다. 저승인가?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살아있다. 죽지 않은 거로구나. 아직은 혼미하다.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볼까. 손가락에 힘을 주어, 까딱. 움직여보았다. 잘 움직인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삐걱대는 감은 있지만 상태는 좋은 것 같다. 힘을 주어 눈을 떠 보다가, 다시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천장의 불빛이 그대로 내리쬐고 있어 어쩔 수 없다.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뜬다. 평소에 지내던 방. 푹신한 감촉의, 침대 위. 적막하고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고 있다. 아무도 없나? 몸에 힘을 주고 상체를 움직여 세우려 했다. 허나 실패한다. 쓰러지기 직전 느꼈던, 그 찌르는 통증의 감각이 다시 한 번 엄습한다.

  “윽….”

  다시 몸을 침대 위로 뉘이고, 방을 자세히 살펴본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 그 위에 놓여 있는, 책갈피가 중간 즈음에 꼽힌 책 한 권. 시선을 옮기면 침대 가까이에 있는 낮은 선반. 그 위를 가득 채우다 못해 땅으로 몇 개 굴러 떨어져 있을 정도로 많은 빈 약병들. 그리고 그 사이에 진한 푸른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빈 꽃병. 저런 게 있었던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 멀어 버린 줄로만 알았던 귓속으로 누군가의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 쪽인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서로 마주치는 푸른색 눈동자. 여러 가지 색의 꽃을 들고 있는 채 눈을 크게 뜬 학자는 활짝 웃으며 나이트에게 말한다.

  “나이트 씨! 다행이에요.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요.”

  학자는 꽃병에 꽃을 꼽으며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의자 위에 있는 책을 집어든 뒤 앉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못 일어나면 어떡할지 걱정했어요. 상처가 심했으니까요.”

  그의 말은 옳았다. 방금 일어난 나이트 자신도 살아있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빈 약병들로 미루어 보아 저의 치료와 함께 치료술을 쓰는 학자 자신에게도 큰 무리가 왔었을 텐데. 그저 감사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인사라도 하려고 몸을 조금이라도 일으키려 하자, 학자는 나이트의 몸을 침대 쪽으로 살살 밀며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더 누워있어요, 나이트 씨. 괜찮아지려면 한참 멀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학자님.”

  학자의 미소에 답하듯 마주 웃음지어 보였다. 지극정성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죽기 직전이었지만 학자는 자신을 살려내었고, 이렇게 눈앞에 있다.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검증할 필요도 없었다.

  “의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득 쓰러지기 직전의 그 의뢰가 생각나 조심스럽게 학자에게 물었다. 학자는 멋쩍게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무어라 대답할 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음… 어떻게든 잘 끝났으니까 걱정 말아요.”

  달리 대체할 말은 없었는지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뒤로 지원군이라도 왔던 걸까? 진위를 알 길은 없지만 해결되었다면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 학자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일 것이다. 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학자님은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

  학자는 나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름의 감사를 말하려 한 것인지는 몰라도 뭔가를 궁리하는 듯 했지만, 입술은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고요한 공기가 둘을 감싸 돌고 있었다. 차마 다 읽지 못한 책의 책갈피를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학자는 결심한 듯 일어섰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더 자고 있어요. 저는… 약병들도 정리해야 될 것 같네요.”

  걸음을 옮기다 발에 채인 몇 개의 약병이 괜히 쑥스럽게 느껴져 챙겨들었다. 너무 호들갑을 떤 것처럼 보이진 않았을지 걱정한 걸까. 나이트는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았다. 작게 “감사합니다.”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나이트에게 보이는 것은 칠흑 속의 작은 바깥 빛 뿐. 그마저도 달칵, 하고 사라진다. 달그락, 달그락. 약병들이 서로 잘게 부딪히는 소리가 어두움 안에서도 아득하게 들렸다.

  “잘 자요.”

  그렇게, 학자의 발걸음소리는 방을 서서히 떠나갔다.





2.5


  해는 이제 막 떠오르는 중이었다. 밝아오는 하늘은 시야가 넓어질 정도로 맑다. 그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 주어서인지 한층 안심되는 아침. 학자는 남은 약병들을 분해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손에서 바스라져 가는 조각을 탈탈 털어낸 뒤 나이트가 회복할 만한 좋은 차가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가까이서 인기척이 났다.

  “위령비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말을 거는 사내의 목소리.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근처의 주민이다. 학자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이 시간에 산책을 나오는 사람이니만큼 그는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매 번 꽃을 들고 나갔으니 예상하기도 쉬웠겠지.

  “나이트님은 괜찮으시고요?”

  그가 나이트를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었지. 학자에게 있어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되도록 공손하게 손을 올려 인사해 보인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방금 전에 깨어났다 다시 잠든 참입니다. 고마워요.”

  사내는 다행이라며 ‘죽는 줄만 알았다’하고 말했다. 학자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넘어갔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으니까. 전투와는 먼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당분간은 몸의 회복만 남았으니, 의뢰인 분껜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급한 불은 꺼졌으니 이제는 뒤처리였다. 그 날의 의뢰는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역시 의뢰인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편치 않을 사항이니 돌봐주어야 마땅하겠지. 사내는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돌아갔다. 그럼 또 뵐 수 있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큰 상처를 입었으니 이곳에 반감이라도 생긴 줄 아는 걸까. 물론 거처를 옮길 생각은 그에겐 전혀 없지만, 조금 불편한 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들어가야지.’

  발걸음이 다시 집 안을 향했다. 마음이 조금 홀가분한 차에, 문득 몸을 멈췄다. 학자의 눈길이 부엌을 스친다.

  ‘….’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약차를 끓여주려던 참이었지. 그에게는 목을 축일만한 게 필요할 테니 말이다. 방금 일어난 채로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니 배도 고프겠고. 맨손으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일렀다. 조심스럽게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찬장을 뒤져 본다. 찬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찻잎 상자들. 학자는 상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톡톡 두드려보다가, 하나를 집어 꺼내들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얹어두었던 물은 슬슬 수증기를 피워내며 끓으려 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마치 설원 위에서 뿌옇게 입김을 내뿜는 그 입과도 같아서.

  “….”

  학자는 가만히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며 눈을 끔뻑이다가,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숨을 내쉬듯 익숙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르슈팡….”

  그리운 그 이름을.






3


  나이트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고 팔을 한 번 돌렸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에 근육이 뭉쳤는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은 듯 두어 번 더 팔을 돌려보였다. 몇 차례 소리가 더 나니 학자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어때요?”

  여전히 걱정하는 눈치가 만연해서인지 나이트는 학자를 보고 살짝 웃으며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학자는 나이트를 빤히 보다가, 둘러싸여진 붕대가 느슨해져 약간 흘러내리던 것을 잡아당겨 풀어내었다. 그의 피부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처가 눈에 크게 들어와, 학자는 조금 움찔한다. 하마터면 저것을 끝으로 그를 영영 볼 수 없었겠지.

  “이제 통증은 거의 없습니다. 간단한 임무 정도는 함께 나갈 수 있겠군요.”

  나이트의 미소에도 학자는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인다. 뭔가, 다 나았다는 무언가를 보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 고민하다가, ‘걸어 볼까요?’ 한 마디를 건넸다.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꾸어, 바닥에 발을 대어 보기 시작했다. 치료의 명목으로 걷지 않은 날이 꽤 되어서인지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익숙하진 않았다.

  “괜찮을 것 같나요…?”

  학자가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먼저 물었다. ‘괜찮습니다.’라 대답하고 팔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휘청거린 것을 제외한다면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학자의 몸이 급하게 나이트를 지탱해온다.

  “…아직은 다리가 땅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학자의 걱정은 끊임없어보였다. 저의 약간 가빠지는 숨결을 들으며 서서히 찡그려지는 미간에 나이트는 급하게 다시 일어서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몇 번 운동하는 걸로도 풀리니 괜찮을 겁니다!”

  학자는 상당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다리를 살폈다. 허나 실제로 다리에는 별다른 상처가 남지 않았었기에 수차례 고민을 거듭하다 납득해준 것 같다.

  그날부로 나이트의 바깥 외출이 허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내심 기뻐했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학자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 싶었으니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시간은 지루하고 미안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쌓인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나니 주인을 반기는 검과 방패가 익숙한 나이트의 손을 반겼다. 흡족하게 웃으며 검을 집어 들고, 근처의 나무인형을 향해 베어내자 정확하게 직격하는 기술. 

  ‘조금 쉬어도 감각은 죽지 않았군.’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수천 번 해와서인지 조바심이 났다.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고, 자신의 회복을 위해 하는 임무가 아닌 학자님의 임무에 합류한다. 지금은 그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운동을 하는 목적이다.

  그리다니아의 의뢰는 쉽고 지루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순찰 임무. 그리고 경계. 전투가 시작되기 전 가장 기초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자신이 임무를 받을 때 느껴지던 시선은 아마, ‘저 사람이 왜 이런 임무를?’하는 말의 대신이었겠지. 회복이 더딘 자신의 몸이 약간 원망스러워지던 참에, 몇 명의 다른 모험가들이 인사해왔다. 모르는 자들이었지만, 아마도 학자와 자신이 한 몸이었을 때 스쳐지나간 사람들이겠지. 적당히 몇 마디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들은 자신에겐 보이지 않는 ‘루티브린’을 이야기하며 조금 흥분한 모양이었다. 분명 그 모습은 오로지 학자의 것이겠지. 자신에게서도 그것이 보인 것일까. 약간은 홀가분해진 기분을 안고, 나이트는 임무를 실행했다.





3.5


  “네, 오늘도 다 끝났어요. 꽤 완벽하게 해낸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나이트는 쭈그려 앉아 작은 드워프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의 주위에 다른 동물들도 서서히 모여가고 있었다. 곧잘 노는 아이들인 듯, 가까이 다가가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평온한 바람. 그에 걸맞게 시원한 소리를 내는 잔디와 나무들. 손끝에 닿는 동물의 털이 부드럽게 지문을 훑는다.

  “학자님이 없었다면 이렇게 만날 수도 없었겠죠. 그동안 잘 있었나요?”

  가만히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분께서 저를 잘 돌봐주셔서 이젠 괜찮아요. 정말 죽을 뻔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친구들. 나이트에게는 그 작은 동물들이 친구들이었다. 교감하듯 귀를 쫑긋거리며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작은 아이들. 가끔 좋은 이야기를 하면 함께 기뻐해주는 그런 동물들이 나이트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소중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힘드니까, 조금은 발전해나가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이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마음의 안식과도 같았다.

  “학자님은 지금쯤 이슈가르드에서 임무 중이시겠지요?”

  그런데 계속 학자가 생각나는 건 어째서인가.

  “저번처럼 학자님이 다칠 만한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속눈썹이 살짝 떨렸지만 안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 때의 자신은 무모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칫하면 그가 죽을 뻔했으니 몸이 움직였던 건 당연했다. 그 사람이 없는 인생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이렇게 깊은 감정을 느낀 것도 그 위기감 때문이었으니까.

  “한 번도 ‘함께’가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

  자기 자신에게 말한 건지, 동물들에게 말한 건지. 그 자신도 잘 모를 정도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감정을 느낀 걸까. 이것이 올바른 건 맞을까. 잘못된 건 아닐까. 수많은 다른 감정이 붙고 붙어 삽시간에 불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걸까. 나름대로의 자기성찰시간이 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나이트는 마지막으로 새끼 커얼의 등을 토닥여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 땐 괜찮을 거예요.”

  혼란스러웠지만 참아야 했다. 가슴이 뚫렸다고 해서 마음까지 망가질 필요는 없었다. 진정하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런 고민을 하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학자님을 만나면 평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오늘의 임무는 괜찮았냐고 보통 하던 대로 물어보겠지. 학자님은 잘 되었다고 대답해주실 거다. 익숙한 길에 접어들 무렵, 멀리서 보이는 반짝이는 빛이 학자의 마법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학자님….”

  크게 부르려다가 멈추었다. 활짝 웃는 학자의 얼굴이 서서히 보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있는 꼬마아이들. 마치 방금 전, 작은 동물들과 함께 있었던 자신과 겹쳐 보였다. 다가가던 발걸음이 땅에 붙었다. 멋들어지게 책을 펼치는 학자. 몇 마디의 주문. 그를 휘감는 빛의 무리. 그리고 그 앞에 뭉쳐지는 환한 빛 덩어리에서 아름답게 튀어나오는 요정.

  “….”

  아이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미소 짓는 학자의 얼굴이 수줍다. 저 자리에 끼는 것은 할 수 없는 짓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텅 빈 집 안. 학자는 그 아이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준 뒤 들어오겠지. 나이트는 학자가 보던 책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쌓인 먼지가 하나도 없다. 감성에 젖어 책을 열어볼지 갈등하던 즈음, 바깥에서 걷는 소리가 나 황급히 손을 떼어버렸다. 고민하지 말고 일찍 볼 걸 그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학자가 돌아왔지만 책을 만진 티는 안 났을 거다. 그가 책을 봤다고 혼낼 사람은 아니겠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 곁눈질을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나이트 씨도 잘 다녀오셨나요? 상태는 좀 어때요?”

  학자는 변함없는 웃음으로 먼저 들어온 나이트를 반겼다. 여전히 걱정하고 있구나. 싶어 나이트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아주 괜찮습니다.”

  임무에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조금 허세를 담아버렸던 것 같기도 해 나이트는 볼을 살짝 붉혔다. 그런 나이트를 이해하기라도 했는지 학자는 제가 앉던 의자에 폭 앉으며 나이트의 손 위에 그 손을 포개었다.

  “잘 회복해주셔서 다행이에요.”

  그 맑은 눈동자가 안대 너머에 닿은 순간.

  “…전부 학자님 덕분입니다.”

  나이트는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였다.






4


  이상 기후가 조금씩 나타났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는 걸 암시할지도 모른다. 나이트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수많은 눈발들을 구경했다. 눈은 항상 오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심하다. 전투에 앞서 하이델린이 은연중 우리에게 경고를 날리는 걸까. 매서운 추위가 벽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이트 씨, 준비 다 했어요?”

  학자가 따뜻한 차를 준비하다 말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학자와 비슷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이미 채비를 마친 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슬쩍 가리켰다. ‘괜찮겠습니까?’하는 무언의 물음이었지만 학자는 평소의 미소로 같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쩔 수 없지. ‘그 사람’이 우리를 불렀으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몇 모금 삼켰다. 몸속으로 깊숙이 흘러들어가는 따뜻한 액체가 조금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하지만 저 바깥에서도 버티게 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굳건히 마스크를 쓰며 문을 살짝 열자니 옷을 뚫고 들어오는 서릿발. 하늘에서 내려오는 서늘함이 온 몸을 삽시간에 감싼다.

  “학자님, 괜찮으십니까?”

  “…네. 곧 약속시간이니까, 얼른 가요.”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거리를 씹어 먹을 정도로 거세게 부는 눈바람은 순식간에 마음을 겁먹게 했다. 이런 때에 몬스터들이 습격하면? 그리고 사람들이 다치면? 쓰러진 사람들은 눈발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죽어버리면? 온갖 부적절한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다행히도 그런 상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도착한 문 앞은 삽시간에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익숙하고도 오래 보아왔던 그 사람, 아이메리크의 앞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왔는가!”

  나이트와 학자는 아이메리크의 반가운 한 마디에 서로 웃음을 지으며 저마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었다. 실내의 따뜻함에 벌써부터 녹아내리고 있는 흰 눈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바닥을 뚝뚝 적시기 시작했다. 바닥을 보며 조금 당황하는 둘에게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저으며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이런 날씨에 오게 만들어 미안하군. 자, 앉도록 하게나.”

  오랜만의 긴 이야기였다.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나이트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학자도 함께 다치지는 않았는지. 조목조목 물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간간히 섞으며 같이 차를 홀짝였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향에 내려온 듯 따스한 느낌이 오르내리던 기분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루티브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잘 회복되어서 다행이야. 자네들은 뭐라 해도 가장 가까이 있는 ‘맹우’니까.”

  달그락. 학자의 컵과 컵받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나이트는 곁눈질로 학자를 슬쩍 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함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만이 눈에 잠시 담겨졌다. 아이메리크는 눈치 채지 못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나도 자네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네.”

  학자는 모든 이야기를 흘리듯 차를 목으로 흘려 넘긴 뒤 아이메리크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아무 것도 모른 채 들었다면 그저 감사함을 담은 한 마디였겠지만, 나이트는 이미 보고 말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 찻잔의 손잡이를 잡는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 차를 삼키며 입술을 조금 깨무는 학자의 얼굴을.







4.5


  나이트의 몸은 본래의 상태로 거의 돌아왔고, 이제는 학자와 함께 하는 임무에도 복귀했다.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아이메리크를 방문한 뒤로 그의 상태는 이상하게도 멍했다. 임무의 난이도는 전과 다름이 없었고 그리 어려운 편도 아니었는데. 마법의 캐스팅이 중간에 끊겨버리거나, 반짝이며 힐을 시도하고 있는 요정만 멍하니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언제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래곤의 시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혼자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뜨거나, 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뢰인이 왔을 땐 괜찮아보였다. 활짝 웃으며 ‘위협적인 드래곤은 정리해두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하고 안심시키는 학자는 아무런 이상 없이 평범했다. 문제는 의뢰인이 가고 나서, 상냥하게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까지 끝마쳤을 때. 조금씩 심해지는 그의 손 떨림은 나이트의 눈에 선명하고 뚜렷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자님?”

  나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으면, 학자는 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무심코 저의 손을 감싸 쥐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곤 손을 슬쩍 봤다가, 멋쩍게 웃어 보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왜 부르셨나요? 나이트 씨.”

  “…아닙니다.”

  그의 웃는 얼굴이 어느 때 보다도 슬퍼 보여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알 수 없겠지. 허나 언젠가는 직접 알아챌 수 있는 날이 오면, 자신의 입장에서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그에게 고민이 생겼다는 건 자신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학자 자신이 깨닫고 있는가의 문제라 생각하고 함구하고 있었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것은 별 수 없으리라.

  ‘무엇을 불안해하고 계신 겁니까, 학자님.’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나이트는 그저 학자의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5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스친다. 의뢰서를 넘기는 손가락이 종이의 끝을 살짝 비비며 고뇌를 보였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며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는 한 번 더 첫머리로 되돌아가 글자를 훑기 시작한다.

  “이번 임무는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이트가 걱정되는 듯 말을 건넸다. 인상을 찌푸린 것도 같지만, 꿋꿋이 쓴 안대는 그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라면, 다른 모험가들을 조금 더 모아서 가는 게 어떨까요?”

  대답이 없는 학자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학자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의뢰서에서 눈을 돌려 학자의 얼굴을 살피니,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학자.

  “학자님!”

  나이트가 크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학자는 고개를 돌려 나이트를 본다. 온갖 물음표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나이트가 이해하기 쉬운 축에 속했다.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거겠지. 나이트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학자에게 재차 이야기를 전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학자는 선선히 고개를 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티가 날 정도로 만들어진 웃음이었지만,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캐묻다가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질 걸 잘 알고 있고, 그런 얼굴을 보기엔 그 자신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학자의 눈동자가 떨렸다. 거짓말? 진실?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말 자체는 그가 원하는 것이 맞았다. ‘열심히’한다. 그는 그렇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임무에 돌입해보고, 안 될 것 같다면 학자님도 후퇴하시겠지. 뭐든지 완벽하게 끝내는 게 모토였기도 하고,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다면 후폭풍이 더욱 크게 오니 말이다.

  “학자님은 언제나 열심히 하시잖습니까.”

  본 것 그대로 전했지만 학자는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 듯 하하 웃었다. 자신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가. 나이트는 눈을 감으며 들키지 않도록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도 그는 항상 생각이 많으셨고, 계획도 잘 짜셨으니까. 아마도 우리 둘로 해결할 수 있는 적당한 임무라고 평가하고 계신 거겠지. 그런 생각으로 그를 따랐다. 드래곤을 베고, 막고, 또 베었다. 베어내고 베어내며 반복한다. 가끔 뒤에서 튀어나오는 온갖 마법들이 제 뒤에 학자가 있는 것을 알려주고 안심시켰다. 그런 날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몇날 며칠, 조금은 버거운 임무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학자는 차별 없이 모든 임무를 받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없다. 집 안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다.

  “학자님!”

  그를 편안하게 바라보는 날도 적어질 즈음, 불현 듯 눈에 스친 그의 모습은 붉었다. 온갖 생채기가 난무했고, 옷은 군데군데가 찢어져 보기에 괴로워 비명을 내지르듯 그를 불러버렸을 때, 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공허하고, 크게 놀란 눈.

  “학자님, 치유술을!”

  “…!”

  학자의 손이 급하게 움직였다. 책을 펼쳐내어 재빨리 캐스팅을 마치고 익숙한 치유의 빛을 만들어내었지만, 나이트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임무는, 무리야.’

  그는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몸을 혹사시키고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5.5


  “학자님. 조금 쉬시는 게 좋습니다.”

  “아니, 전 더 할 수 있어요.”

  학자가 급하게 일어서려던 것을 나이트가 팔을 잡아 저지한다. 더 이상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처럼 그도 죽을 고비를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은 학자 덕에 살았지만, 학자 그 자신은 어떻게 치료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임무에 정신이 팔려 계속해서 의뢰를 받고 있는 게 아니었다.

  “최근 다른 데에 정신이 많이 팔려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학자님.”

  ‘다른 데?’ 학자가 중얼거리듯이 단어를 반복했다. ‘별 일 없어요.’ 하고 고개를 저어보이지만 평소처럼의 웃음이 아닌 걸 잘 알고 있다. 공허하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만들어낸 웃음.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물론 고민이 있는 걸 안다. 하지만 학자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쉽사리 가르쳐 줄 생각이 없으리란 것도 잘 안다. 나이트는 입술을 깨물면서 수긍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은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인가. 조금 더 그에게 신뢰감을 쌓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만 자는 게 좋겠네요.”

  학자가 나이트를 살짝 밀어 눕힌다. 그리고 손으로 어깨를 토닥여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자신은 이것을 원하고 있다는 듯이.

  “…무리하지 마십시오.”

  학자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은 느낌. 답답함이 속에서 응어리져 사라지지 않았지만, 내일 아침도 그에게 이야기해본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자기위로하며 나이트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6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학자님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침이 아니었다. 해가 거의 중천에 뜰 정도로 늦은, 점심 직전. 임무가 있었는데, 어째서 학자님은 자신을 깨우지 않고 나간 거지? 쉬운 임무였던가. 어제의 일로 피곤해서 그냥 두고 가신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쯤이 돌아오실 시간일지도.

  일단은 나갈 채비를 미리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옷을 챙겨 입었다. 학자가 끓이고 나간 게 분명한, 따뜻했을 찻잔도 식어서 차가워져 있다. 그의 정성을 식혀둔 채로 버리기엔 아까워 그 시원한 것을 그대로 목구멍에 쏟아 부을 즈음,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놀라움의 비명들.

  “?”

  그 비명은 예사롭지 않았다. 웅성거림도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급함. 무서움. 당황. 그 모든 것이 섞인 높은 웅성거림은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쓰러지고 나서 마을로 들어왔을 때의 짧은 기억 속.

  나이트는 불길한 예감이 솟구쳐 들고 있던 빈 찻잔을 쑤셔 넣듯 접시 위에 올려두고는, 발목이 아플 정도로 다리를 움직여 달렸다.

  “……학자님!”

  그래,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전개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이트의 손에서, 챙그랑. 들고 있던 칼이 기세 좋게 떨어졌다.

  피투성이의 학자는 가까스로 마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녀왔어요, 나이트 씨.”

  그 웃음은, 상당히 홀가분해보였다.





6.5


  “치료술은 왜 안 쓰셨습니까? 그리고 방어막도!”

  그를 질책하듯 나이트는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냈다. 본래 몸이 좋지 않은 학자가 혼자 임무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자신도 알고 있었으면서 안심하고 있었다. 나이트는 그에게 소리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기 시작했다. 왜 그를 이렇게 될 지경까지 막지 않았나.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그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학자는 여전히 그 몸을 일으켜 임무를 나갈 생각이었다. 삐걱대고 피가 흐르는 몸을 이끌고 약을 먹어서라도 끝없이 회복하며 몸을 혹사시킬 생각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것을 반복할 생각인 걸까. 막아야 했다. 막아야 한다. 그를 더 이상 그 날의 자신처럼 만들 자신이 없어 억지로 그를 눕혔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테니까, 누워 계십시오. 학자님.”

  억지로 그를 눕히며 쥐어짜내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발.”

  제발, 누워계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머릿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치유술을 쓰면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한 마디도 꺾일 생각이 없었다.

  “학자님. 피가 납니다.”

  “상관없어요.”

  땀이라도 닦아내듯 대충 소매로 피를 닦아내는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 그 누구보다도 몸을 소중히 여기고 다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학자님.”

  “괜찮다고 했잖아요. 나이트 씨.”

  그 말이 이상하게도 다정하게 느껴져서.

  “…다치지 마십시오.”

  “그건… 모르겠어요.”

  제발. 이라는 말을 한 번 더 입 바깥으로 내려고 했지만, 그의 간절한 얼굴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후에 후회했어도, 그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겠지.






7



  오늘도 눈을 뜨면 학자님이 없다. 찾으러 나가면 언제나 쓰러지기 직전. ‘그러실 거면 제발 저라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고려하지 않고 최전선에 먼저 나가 싸우다가 다치기 일쑤. 그래서인지 나이트는 해결책을 찾으려 들기 시작했다. 잠에 들지 않고 아침까지 깨어 있다가, 학자보다 먼저 차를 끓여 주기로. 조금은 다시 생각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는 달리 학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학자님, 아침은….”

  “괜찮아요.”

  바닥에는 이미 약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제 마신 건지 오늘 마신 건지도 모를 약병들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분명 방금 하나를 마신 거겠지. 차를 끓이고 있었던 손길이 무색하게도 학자는 빈속으로 바깥을 향하려 했다.

  “몸도 좋지 않은데 자꾸 나가시려는 겁니까?”

  학자는 이제 표정도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에게 주던 눈길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볼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이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책임감이 넘치는 한마디가 그토록 가슴을 후벼 팔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이트의 머리끝까지 피가 쏠렸다. 당신이 그 상태로 무얼 한다고,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저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나이트 씨…?”

  문을 향해 손을 뻗는 학자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그리 약하진 않게 밀어 침대에 눕혀버린다. 도로 일어나려는 학자였지만 나이트는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학자의 팔을 잡아 침대에 고정시켰다.

  “학자님.”

  조금 쉰 목소리가 학자의 귀를 긁었다. 발버둥, 그리고 약간의 발길질.

  “놓으세요, 나이트 씨!”

  노려보는 그 눈이 처음부터 보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이트는 봐주지 않았다. 아무리 약을 먹은 상태일지언정 학자의 힘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가 나이트의 상대가 될 몸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차이였다. 서서히 학자의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았지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학자. 더 이상의 저항은 없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깜빡이는 그.

  “진정되셨습니까?”

  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의 정리가 조금이라도 된 걸까.

  “도대체 뭐가 그리 불안하신 겁니까.”

  학자의 눈동자가 나이트의 안대 너머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서로 맞닿았다. 그의 눈이 몇 번 더 깜빡이다가, 눈가가 서서히 붉어진다. 처연히 차오르다가, 볼을 타고 식은땀과 함께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

  “나이트 씨.”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 않았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나이트의 이름을 부르는 학자.

  “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릴 수 없어요.”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영웅도 될 수 없어요. 나이트 씨처럼 강하지 않으니까.”

  나이트가 붙잡고 있는 팔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었다. 허나 학자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나이트의 팔을 붙잡았다.

  “나는, 영웅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고요하고 적막하게 방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 나이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목소리를 귀담았다.

  “무너질 것 같아요. 자꾸 그런 생각이 나요.”

  부서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요. 아주 작게, 나이트의 귀에 소곤거리듯 덧붙인 말은 그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한 번만 기댈 수 있게 해 줄래요?”

  나이트는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조심스럽게 손을 옮겨 학자를 받쳐 주는 손은 부드러웠다. 고개를 선선히 끄덕여주고, 유리조각을 안는 듯 학자를 안아주었다.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숨기고 흥분하지 않으려 했다. 그를 위로하는 게 급선무니까. 토닥이고, 토닥였다. 학자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학자는 흐르던 눈물이 마를 때 즈음까지 아무 말 없이 안겨 있다가,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아니, 부탁을 했다.

  “나,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들어줄래요?”

  나이트는 학자를 살짝 떼어내 얼굴을 마주보고, 될 수 있는 한 무해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학자는 손을 올려, 나이트의 뺨을 쓰다듬었다가 천천히 그의 안대를 벗겨내었다. 푸른 눈이 곧게 그를 향한다. 방해물 없이 온전한 눈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를 한 번만 ‘맹우’라고 불러주세요.”







7.5


  맹우? ‘그 사람’의 말버릇이 아닌가. 나이트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야 기억을 되짚었다. ‘그 사람.’

  ‘오르슈팡.’

  자신과 같이 방패를 들고 있던 자.

  자신이 드래곤의 발톱에 상처를 입어 크게 다친 그 날, 애타게 자신을 부르던 학자.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학자. 잠결에 들었던 ‘죽으면 안 돼요’하는 말.

  그렇구나.

  이 사람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박하려고 했다. 조금 화가 났다. 그토록 나를 불러주었는데 결국은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음을 여태 간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올곧은 눈동자를 피할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안대 없는 깨끗한 눈길로 마주보는 것이라서, 결국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입에 담고 말았다.

  “맹우여, 오늘도 훌륭했네.”

  나이트는 손가락으로 학자의 눈물자국을 닦아주었다.

  “자네의 그 표정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군.”

  학자는 나이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맺혀 있는 작은 눈물방울은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쉬게나.”






8


   그날부로 나이트와 학자는 한 침대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학자의 상태도 그리 무리하고 있는 기색이 아니고, 나이트도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이 옆에 있는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었다. ‘그 전투’에 대항할 장비도 이제는 슬슬 갖춰지는 참이고, 시간에 쫒기지 않고 느긋하게 의뢰를 하러 다니는 것도 이전처럼 평화로웠다.

  허나 의뢰 후, 집에 돌아오면서부터가 나이트는 곤혹이다.

  “한 번만 더 불러줘요.”

  물론 알고 있다. 예의 그 ‘오르슈팡’씨의 흉내를 부탁하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곤 있어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슬프게도 말이다.

  “오늘도 수고가 많았어, 맹우여. 자네와 함께 가는 길이 매 번 기쁘다네.”

  이건 그의 요구에 응하며 만들어낸 말일까, 아니라면 자신이 그에 대입되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제는 더 노골적인 부탁을 잠자리에서 듣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만, 그 사람처럼 행동해 줄 수 있어요?’하는 물음.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선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로 묻는 그의 얼굴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제가요?”

  나이트가 생각하기론, 자신은 오르슈팡과 체격부터가 차이가 났었다. 학자는 분명 그와 손도 잡아보지 못했고, 안아보지도 못했을 터인데. 그가 그만큼 많이 약해졌던 탓일까. 결국 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학자가 나무 밑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 줄 때마다, ‘학자님은 지금 오르슈팡을 일으키고 있는 거겠지.’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전 자신을 껴안으며 ‘잘 자.’라고 할 때마다 ‘학자님은 분명 오르슈팡을 껴안고 계실 거야.’하는 생각도 했다. 임무 중 몬스터들을 보고 있다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뒤 미소지어 줄 때는, ‘나에게서 오르슈팡을 보고 있는 것인가.’ 자꾸만 ‘그’의 생각이 났다.

  ‘나에게는 그저 안타깝게 떠난 친우였을 뿐인데.’

  그에게는 그게 아니었겠지. 어떻게 해야 좋을까. 궁리해보았지만, 이대로 학자를 놓기에는 아깝다. 제 앞에서 보여주는, 조금 다른 학자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계속해서 눈에 담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8.5


  “학자님.”

  나이트의 부름에 시선을 돌리는 학자. 오르슈팡의 흉내를 낸 지도 꽤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은 궁금증들이 연이어 머릿속을 헤집었기에, 넌지시,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물음을 던졌다.

  “아이메리크 씨에게는 부탁하지 않는 겁니까?”

  오르슈팡의 체격이라면 그의 체격과 딱 맞을 텐데. 왜 그렇지 않은 걸까. ‘게다가 말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어가 빠진 물음이었지만 학자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렇긴 하죠.”

  허나 그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내가 영웅으로써 지켜야 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메리크 씨에게는 부탁할 수 없죠.”

  손에 깍지를 끼고, 학자는 말을 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어요.”

  후후, 소리 내어 웃는 학자.

  그리고, 잘게 떨고 있는 그의 손.

  나이트는 그의 손을 보다가,

  “그렇습니까.”

  하고. 눈을 감았다.






9



  “걱정했잖아요, 나이트 씨.”

  또 다칠 뻔했잖아요. 뒷말은 삼켰지만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상냥한 질타.

  “앞으로도 조심해주세요. 그 때처럼, 그런 건. 보기 힘들어요.”

  학자는 나이트를 꽉 끌어안으며 소중한 듯이 중얼거렸다.

  “죽으면 안 돼요. 나의 맹우.”

  “….”

  나이트는 그저 자신을 안은 학자를 토닥여주었다.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는데도,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참아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로써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 아직까지는….

  “계속 내 곁에 있어줘…. 오르슈팡.”

  “….”

  오르슈팡. 오르슈팡, 오르슈팡…! 뭔가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하다. 그 단어를, 더 이상 듣기가 힘들었다. 결국 학자는 자신을 안으며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나이트는 이제 참을 생각을 고이 접었다. 거칠게 학자를 제 몸에서 떼어내고, 안대를 벗은 뒤 자신과 똑같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학자님.”

  더 이상 그 사람의 말투를 쓰기 싫었다. 학자도 어투가 바뀐 것을 눈치 채고 눈을 약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본다.

  “저를… 있는 그대로 보아 주시는 건 안 됩니까?”

  학자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오르슈팡이 아닌 건 싫은 겁니까. 저 자신과 대화하기도 싫은 겁니까?

  “저 자신에게 기대어 주시는 것도 안 됩니까?….”

  학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감정에 복받쳐, 나이트는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저는 저 자신인 채로 당신을 안을 수도 없는 겁니까?”

  학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묵묵하게 나이트를 보았다. 새빨갛게 상기된 나이트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하다.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자, 학자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가, 드디어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넘겼다.

  “그렇다면, 나이트 씨가 선택하세요.”

  학자는 나이트를 살짝 밀쳐 자신에게서 조금 떼어 내 버렸다.

  “당신이 아닌 채로 나를 안을지,”

  나이트의 눈동자가 크게 떨리기 시작한다.

  “아니라면,”

  학자의 표정은 다정하고 단호했다.

  “당신인 채로 평생 건드리지 못할지를.”

  마른 목 넘김이 심히 불쾌했다. 입 속이 말라왔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떤 대답을? 나이트는 혼란에 빠지며 눈을 굴렸다. 그의 얼굴. 그의 손. 그의 입술. 수많은 장소로 어지러이 눈동자가 움직였다.

  나이트의 입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

  결국에는.

  “…오르슈팡으로써, 당신을 안겠습니다.”

  이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학자는 침대에 누우며, 나이트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잠이 오듯 눈을 감는 그 표정은 무척 만족스럽게 보였으리라.







9.5


  결국 그는 먼 길을 돌아 잘못된 선택을 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Fin.

Posted by MD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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