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프레오]

슈뢰딩거의 고양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설명한 이론으로,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있는 고양이의 생존 여부를 이용하여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상자 속 고양이의 생존여부는 그 상자를 열어서 관찰하는 여부에 의해 결정되므로 관측행위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 사고실험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Twitter @CanUSmlie 산들님 리퀘




그의 안에는 고양이가 있다. 날카로우면서도 사려깊고, 새침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모자람이 언뜻 보이는 그런 고양이다. 그와 쏙 빼닮았다. 재프 렌프로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냥 거리를 걸어다닐 때. 경마장에서 한껏 소리지를 때. 카지노에서 돈을 날렸을 때. 그리고 여자와 몸을 섞을 때. 시도때도 없이.

지금 자신의 옆에서 룰렛을 돌리는 사내의 안에는 뚱뚱한 고양이가 있다. 움직이기 싫어하고, 일확천금을 앉아 원하는 구역질나는 고양이다. 오전의 경마장에서 돈을 받는 알바생 꼬마의 안에는 비실비실한 고양이가 있다. 하지만 의지는 굳건했다. 꼭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따가울 정도다. 침대 위 자신의 아래서 애교섞인 신음을 내고 있는 여자의 고양이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 성격은 생각보다 괴팍한 것 같다. 재프는 그 하룻밤을 뒤로하고 숙취를 해소하러 거리에 나온다. 밖은 벌써 해가 중천이다. 초여름의 직사광선이 바닥을 꿰뚫는다.


" 어라. 재프 씨. "

" 거기 있던 게 너였냐. "


한껏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고 있는 재프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맞은편에서 헐렁한 옷차림을 하고선 제 애완원숭이와 손가락으로 놀고 있었던 레오다. 딱히 감흥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재프는 잠시 멈칫한다. 그의 눈에 하나 둘 씩 들어오는 자잘한 레오의 상처들. 또 불량배나 양아치들에게 걸린 걸까. 재프는 시비조로 말한다.


" 네 눈은 어디 써먹으려고 달고 다니냐. "

" 뺏긴 건 별로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

" 내가 걱정같은 걸 할까보냐. 꼴 좋다. "


그럴 줄 알았어요. 피식 웃으며 레오가 중얼거렸다. 그의 속에 있던 고양이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였다. 항상 하던 말이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반응이 영 시원찮다. 재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별 생각없이 보이도록.


"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냐. 음모머리. "

" …. "


그는 침묵했다. 자세히 말해주기는 싫은 것이겠지. 이전 일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눈을 드러내지 않으면 무척이나 평범한 소년이였지만, 눈을 뜨는 순간만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의 눈을 대가로 얻은 신의 의안은 이미 이 세계의 뒷골목에선 유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능력을 쓰면 될 것을, 일반인에게는 쓰지 않겠다나. 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렸다. 불안한 건지, 아니라면 무서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름대로 재프를 신뢰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걸 테지. 재프는 그게 기쁘긴 했지만, 혀를 찼다. 어수룩한 그가 조금은 안타까워서. 그에게 어깨동무를 한 뒤 힘차게 무게를 실었다. 좀 더 자신에게 의지해주면 좋으련만.


" 아 좀, 무거워요! "

" 냅둬. 원숭이는 벌써 어디 가고 없냐. "

" 먼저 가 있겠죠. "


재프의 팔 무게때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려던 레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재프의 옆볼을 간질인다. 그에게 있어서 재프는 무언의 보디가드였다. 보통의 라이브라의 일원들보다 몸이 약하고, 체력이 바닥인 레오로써는 신의 의안이라는 위치에 있어 아주 좋은 납치감이였기에 전적도 많고, 살해 시도도 어렴풋이 있었다. 그가 모르게 미리 처리했으니 그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재프는 레오가 항상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것들의 처리에 신경썼을지도 모른다.

재프와 레오는 길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은 불지 않았고, 공기는 고요했다. 거리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적당한 말소리만이 귀를 파고들었다. 웅성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터벅거리는 둘의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리듬을 탔다.


" 재프 씨. 이제 팔 좀 치워주세요. "

" 어엉. "


레오가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더운 날씨가 아니였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었다. 옷도 옷인데다 재프의 팔 무게가 실려 헉헉대던 참이였다. 재프는 순순히 팔을 올려 무게를 덜어주었다. 마침 그가 비틀거리던게 느껴지기도 했고.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해서. 이제 둘은 나란히 걷는다.

목적지는 금방이다. 라이브라는 이 길 건너의 골목 안에 있었다. 워낙 숨겨져 있는 곳인 데다가 비밀리에 싸인 집단이라 그런지, 들어가는 데에도 나오는 데에도 조금 신경을 써야 했다. 물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라 다들 크게 걱정하지는 않고 있으니 상관없다.

열쇠로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항상 하던 짓이다. 레오는 여전히 땀을 흘렸다. 어지간히 더운가. 하고 재프는 생각한다. 아냐, 분명히 더운 날씨는 아니였는데. 팔도 금방 치워줬고. 평소랑 다른 게 뭐가 있지? 재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주머니에 든 지포라이터를 손으로 딸깍대었다. 레오의 고양이는 어쩐지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지포라이터의 차가운 효과음이 엘리베이터 안을 간간히 채운다. 물어보아야 한다.


" 감기냐? "

" 뭐가요. "

" 땀이 많이 나는데. "


아니면 다른 뭔가가. 그의 행동이 조금 수상했다. 이렇게 체력없는 놈은 아니였는데. 레오는 시선을 피했다. 왜지? 항상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착각한 게 아니냐며 바락바락 대들던 건 어디로 간 거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렸다. 그들은 대화를 이을 노력도 하지 못하고 내려야 했다.

재프는 내려서라도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관두었다. 레오는 사무실로 발을 들이밀자마자, 미리 도착해있던 소닉이 어깨에 앉은 것을 빌미로 재프에게서 곧바로 멀어져 쇼파에 앉아버렸다. 재프는 윗입술만 살짝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위험한 일이 있다면 도청 정도는 무릅쓰고 말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여차하면 계속 자신이 붙어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의 안전을 소홀히하고 혼자 많이 싸돌아다녔던 것 같으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체스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크라우스가 그제서야 온 레오와 재프를 보고 인사하고, 언제나처럼 커피를 타 마시고 있던 스티븐과 인사하고. 날아오듯 재프의 위로 착지해 밟아버린 체인과 얼떨결에 싸우고. 항상 반복되던 일상이였다. 그래서 재프는 신경쓰이던 일을 잊었다. 아니,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지만 기억 저편으로 묻어두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 왠 박물관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 같아 크라우스와 재프는 나가보아야 했다. 레오는 사양한다. 저는 별로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하더라. 귀찮구만. 도난사건이라니, 게다가 훔친 것들은 꽤 고가품이잖아? 못 잡으면 블랙마켓에 나오는 거 아냐? 그걸 사면 되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도난범들은 약했지만 물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건의 추적은 경찰들에게 맡겼다. 재프는 곧바로 라이브라에 돌아와 레오를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 날 일찍 퇴근했던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이튿날이다. 재프는 전날 했던 결심을 잊지 않고 온종일 레오를 따라다녔다. 대놓고는 아니다. 그 때 이후로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멀찍이서 바라보며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불량배들과 마주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프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다고 훗날 자학한다. 레오의 고양이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고, 멀리서도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재프는 몸을 기울였지만 레오는 고개를 돌렸다. 항상 자신에게 살갑게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대꾸해주고, 마주쳐 오는 그였을텐데. 어쩐지 싸늘함이 등 뒤에서 물러나질 않는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일주일 째였다. 슬슬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잖아. 그러면서도 그의 행동이 불편하다. 대놓고 앞에 나가서 멱살을 잡고 털어대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분명 미쳤냐며 뿌리칠 게 뻔하다. 재프 씨랑은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하고 소리칠 것이다. 사실 예전엔, 저 정도는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불량배들에게 끌려가는 걸 방관한 적도 있고, 개인적인 일로 혼자 돌아다니던 중 이미 몇 차례 주먹에 맞아있는 걸 발견한 적도 있으니 그에 따른 불신이 있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신뢰를 주지 못한 걸까. 재프는 조금 슬퍼한다.

재프는 건물 옥상 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시선은 레오를 향하고 있다. 이쪽 거리는 왠일로 왔지. 시장 부근이라 복잡하고 귀찮은데. 사람이 많구나. 아, 오늘 돌아갈 때 맥주나 사 갈까.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잘 보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레오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를 스쳐지나가는 버스가 잠시 그를 가린 후로 흔적도 없이, 텅 빈 공간만 남기고.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롭게 물건을 사거나, 흥정을 하고 있다. 재프는 벌떡 일어나 열심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갔지? 왼쪽? 오른쪽? 아니라면 버스의 누군가에게 채여간 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그를 찾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납치인가, 제길! 재프는 곧장 뛰어내려가 그가 사라졌던 곳 근처를 향했다.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조금 무리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 빌어먹을, 어디로 간 거야..! "


재프는 손톱을 세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일단은 무작정 달렸다. 거리의 건너편은 시장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북적대고 인파도 엄청났다. 하지만 분명 눈을 떼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를 데려간거지? 그리고 버스가 지나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사람을 숨길 수 있을 만한 건물이나 장소는 없는데. 생각해라 재프 렌프로. 그래, 역으로 생각해보자. 나라면 그를 어떻게 빼돌릴 것인가. 생각하고 생각했다. 영 진행되지 않았다. 라이브라에 알려야 하나? 아마 그의 몸엔 추적기가 달려 있을 테니 그것을 추적하면 곧바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5분정도가 지나 있었다. 지금 당장 라이브라에 가서 이 일을 전달한다 해도 늦을 것이다. 젠장. 그 녀석 눈을 빼다 팔았으면 벌써 팔았겠다! 얼른,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가 위험해. 생각, 좀 더 생각을…?


" 아. "


재프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자신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문득 깨달았다. 인파는 많고, 시장 주위라서 소리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골목은 꽤나 복잡했다. 게다가 이 쪽은 원래 그가 다니던 길이 아니였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재프는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섰다. 그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납치당한 건 아니다.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 납치하는 것은 목격자들을 늘릴 뿐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력으로 사라진 것이다. 레오는, 그의 눈을, 신의 의안을 써서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몰래 미행하며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프는 그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녀석이 왜? 무슨 이유로?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이 얼굴선을 타고 흘렀다. 레오나르도 워치는 어째서 몸을 숨겼는가. 자신에게서. 아니, 라이브라에게서?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에서 표정이 좋지 않았을 때 그것을 꼭 물어봤었어야 했다. 완전히 계획된 실종이잖아, 이건. 재프는 후회하고 후회했다. 지났던 5분은 어느 새 10분이 되었다. 시장은 여전히 활기찼고, 그의 몸뚱아리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추적을 할 수도 없어. 감이 잡히질 않잖아. 레오.


" 무슨 생각이냐, 음모머리. "

" 아. 아. 카메라 테스트. "

" …! 레오? "


무심코 중얼거린 재프의 한 마디에, 가까이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장 뒤돌아보았지만 레오처럼 보이는 형상은 없다. 다만 그의 원숭이 소닉이 레오의 노란 카메라를 들고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 재프는 쭈그려앉아 원숭이와 마주보았다. 레오의 목소리가 카메라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 초록색 바탕에 파란 줄이 가로로 세 개 그어져 있는 알 모양 그림. 그림이 절반으로 전봇대에 가려져 있는 건물의 지하 6층. "


알 모양의 그림? 건물의 지하? 재프는 재빠르게 소닉에게 손을 뻗었지만, 소닉은 재빨리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채로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간다.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카메라의 화면은 새까맸으며,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레오의 목소리가 이어서 재생된다.


" 아마 나는 그곳에서 죽거나, 눈을 잃을 것이다. ○○년 ○월 ○일 ○시 ○분. 내 이름은 레오나르도 워치. 주운 사람이 있다면 이 카메라를 나의 가족에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주소는… "


재프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이 새끼가 누구 마음대로 뒤지려고? 카메라에서의 레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니, 그의 집 주소를 부르는 도중까지는 담담했다. 그 뒤로 조금씩 목소리가 흐트러지더니, 뒤이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동영상을 중도에 끝내 버렸다. 치직거리는 음이 들리고, 영상이 종료되었다. 소닉은 어깨에 앉아 가만히 재프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원하는 눈빛이다.

소닉의 손은 레오의 카메라를 꽉 붙들고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재프는 곧바로 방금 전처럼 다리를 움직인다. 소닉을 앞장세워 그가 들어갔을 법한 건물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이 많으니 건물 위를 뛰어다니며 전봇대를 먼저 찾고, 그 전봇대 가까이에 있는 알의 그림을 찾아다녔다. 여기에도 없다. 여기도. 저 쪽의 전봇대가 있는 벽은 말끔하다. 알을 찾았다 했더니 전봇대는 온데간데 없다. 동선을 줄이고 줄여서 이제 뛰어다니는 데만 해도 지칠 즈음. 소닉이 재프의 바짓단을 잡아 끌었다.


" 찾은거냐? "


소닉은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하는 행동 없이 곧장 달려나갔다. 아려 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재프는 뛰었다. 소닉이 찾은 건물은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다. 20분 정도면 죽은 시체에 온기가 아주 조금 남아있을 정도. 좋지 않은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재프는 앞뒤 가리지 않고 건물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지하, 지하는 어느 쪽이지. 엘리베이터를 찾았지만 없다. 그렇다면 분명 어딘가에 계단이 있을 테지. 비상구 표시가 있는 곳을 찾았다. 초록 불빛이 꺼질 것 같이 아른거리는 푸른 불빛이 복도 끝에서 반짝거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죽지 마라, 죽으면 내가 뭐가 되냐! 하는 일념으로 달렸다.

계단을 날다시피 뛰어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층마다 커다란 철문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자물쇠를 채우는 구멍은 있었지만, 채워 두지는 않았기에 계속해서 문을 박차고 내려갔다. 문이 부서질 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계단을 쨍쨍 울렸다. 두꺼운 철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팔이 아파온다. 무겁고 육중한 느낌에 욱씬거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지하 6층에 도달했을 때였다.


" 자물쇠…. "


5층까지는 보이지도 않던 자물쇠가 문의 손잡이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쇠창살로 몇 번 휘감아두고 그걸 한 번 더 휘감아 채워 둔 단단한 자물쇠다. 부술 수는 있지만, 차라리 문짝을 부수는 편이 더 좋을 정도였다. 발이 아려왔다. 문득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 분명 해결책을 찾아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 글쎄. 우리가 좀 더 원하는 게 있어… "

" 돈도 확실히 지불했고, 제가 그… 그것의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까! "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


레오의 목소리와 이상하게 토기가 들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호무라마루를 내어 잡았다. 재프는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대었다.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지, 공기가 울려 안쪽의 소리가 왕왕 울려들려왔다. 돌연 콰당탕하며 무언가 커다란 것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난다. 재프는 움찔했다. 들어갈까? 조금 상황을 더 볼까?


" 움직이지 마시죠. "


레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챙강, 달그락. 온갖 것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옅은 신음소리가 울린다. 점점 커지더니, 비명소리로 바뀐다. 귀를 찌를듯한 한 사내의 비명소리가 뇌를 울렸다.


" 그만…! 그만 하시게…. "

" 그럼 정보를 주실 건가요? "

" 알았네, 알았어…. 정보를 주겠네. 일단 그를 놔 둬 주게…. "


어휴. 하는 커다란 한숨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레오인가. 그래, 의안을 썼구나. 왠지 그가 기특해졌다. 그토록 쓰라고, 쓰라고 귀가 떨어지도록 말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더니. 할 땐 하는구나. 조금만 더 상황을 볼까. 아마 그가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몰려온다. 하지만 일단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항상 이런 안일한 생각의 끝은 좋지 않았으니까.

자네, 괜찮은가! 하는 저쪽 편의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우웩거리더니 한바탕 쏟아낸 듯 한 의안의 피해자는 아직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챙강거리는 소리는 그들의 연장 소리였을까. 쇠막대기 따위를 떨어뜨리는 날카롭고 굵직한 소리였다. 미친놈들. 아무리 신의 의안의 보유자라지만, 그 정도까지 사람을 몰아세울 정도가 있었나. 혼자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안의 상황을 분석했다. 적은 다섯 사람 정도일까. 아니, 기척을 숨기고 있거나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런 건물의 지하에다가 자물쇠를 채워 사용할 정도면, 게다가 외진 곳이니 올 사람도 없는 게. 베테랑이다. 범죄 집단일까. 레오는 정보를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보상 집단인가? 일단은 여러가지 유추해본다.

하지만 아직 의문인 것이 있었다. 왜 레오는 그의 카메라에다가 '죽는다'고 한 걸까. 아니, 죽지 않으면 '눈을 잃는다'고 했다. 죽거나 신의 의안을 잃는다. 무슨 생각으로 레오는 그들에게 간 것일까. 미루어 짐작하자면 의안에게서 자신을 떼어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의안을 포기한다면. 그의 여동생은 어쩐단 말인가. 그 선택을 되돌릴 방도라도 찾고 있는 걸까?

돌연, 콰당하는 소리가 나더니 레오의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재프가 재빨리 귀를 다시 문에 가져다댔다. 뭐냐, 무슨 일…!


" 으윽…! 지금 무슨 짓을! "

" 자네의 이용가치는 많지만…. 지금 상황으로 따져서, 이것이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일세. "


재프는 호무라마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는다. 지금은 귀를 대고 들으며 감상할 때가 아니다. 베어라. 저 곳으로, 지금 당장 들어가야 한다. 사내의 뒷말이 짐작되는 지금, 재프는 잠시 이성의 끈을 놓을 참이였다.


" 눈을 빼내라. "


사내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재프는 문을 호무라마루로 재빨리 베어내고 들어간다. 철문이 날카롭게 잘려나가는 소리에 안에 있던 모든 시선이 재프에게로 쏠렸다. 문 안쪽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나빴다. 레오는 양 옆으로 이계인들에게 붙잡힌 채 기분나쁘게 생긴 화려한 옷차림의 사내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주위는 이계인과 휴마가 섞여 있었지만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이따금 신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만이 주로 효과음을 이뤘다.

레오의 몸에는 이미 생채기가 많이 나 있었다. 주위는 다들 배트나 철근같은 살벌한 도구를 들고 있다. 짐작했던 것과는 틀리지 않았지만, 인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상관은 없지만, 문제는 레오였다.


" 재프… 씨…? "


그가 재프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신의 의안은 이계인의 뾰족한 송곳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송곳을 잡은 이계인의 팔을 작은 두 손으로 부들거리며 제지하고 있는 레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레오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듯한 사내는 어느 새 기분나쁘게 웃고 있었고, 주위에 서 있던 이계인들과 휴마는 드디어 힘이 풀렸다는 듯 주저앉았다. 재프는 섣불리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사내는 재프를 보며 피식 웃었다.


" 다가오면, 신의 의안을 꼬챙이로 만들어 드리지. "

" …. "


구역질나는 고양이다. 라고 재프는 생각했다. 능글한 눈빛 하며 몸짓이 썩어빠진 하수구의 고양이가 그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레오의 팔이 점점 더 강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는 가만히 멈춰 서서 상황을 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재프가 호무라마루를 꽉 쥔다. 그리고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사내가 당황한다.


" 듣자하니, 거래는 결별인 것 같은데. 이만 그 꼬맹이를 데리고 나가도 될까. "


당신네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쳐먹겠다, 이 말이야. 나리의 명령도 건성건성 듣는 내가 늬들 위협에 멈칫할 리가 있겠냐. 재프는 레오의 위에서 송곳을 잡고 있는 이계인에게로 달려가 검을 내리쳤다. 아니, 내려치는 행동을 했다. 기대했던 칼날은 오지 않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의 액체가 분사되듯 퍼진다. 이계인은 그 액체를 맞곤 뺨따귀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게 동공을 풀었다. 어느 새 저만치 날아가 벽에 부딪혀선 기절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땡강. 어느 새 누운 자세가 되어 버린 레오의 볼 옆으로 날카로운 송곳이 한 박자 늦게 떨어진다. 차가운 금속음이 레오의 귓바퀴를 돈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윗몸을 일으켜 송곳에서 재빨리 멀어졌다. 히이익, 하는 작은 비명은 덤이다.


" 괜찮냐. "

" 아뇨. "

" 그럴 줄 알았다. "


레오의 즉답에 재프는 진심으로 웃었다. 힘은 없어 보이는데, 아직 정신은 멀쩡하구만. 다행이네. 레오의 팔을 잡아당겨 확 들어올리고 어깨에 둘러업었다. 버둥거림없이 쭉 늘어져 가만히 있는 레오. 재프는 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곤, 속삭였다. 숨 참아. 조금 웅크리고.

순식간에 불길이 재프의 주위를 둘러쌌다. 후끈한 열기가 지하의 방을 휘감았다. 바닥을 보면, 피가 둥그런 모양으로 그를 에워쌌다. 재프가 아끼는 지포라이터가 그의 손에서 찰칵거리는 소리를 낸다. 불이 난 것은, 재프의 주위만이 아닌 듯 여기저기서 급박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왠만한 화상으로는 어림없을 테지. 쓰라려서 말도 못 할 것이다. 재프는 레오를 붙잡고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들어갔다. 둘은 그렇게 매캐한 연기속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지하 2층까지 연기가 자욱했지만, 그 위로는 맑다. 아직 건물 바깥까지는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을 지체하면 연기가 퍼져 소방차가 오는 등, 귀찮아질 테니 얼른 시장가를 빠져나오기로 한다. 목격자는 많을 테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 않은가. 그들의 증언은 미묘하게 어긋난 채로 맞물려 부서질 것이다.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레오의 눈에 의해서.


" 다친 데는. "

" …. 다리가 조금. "

" 내 봐. "


재프는 인적없는 골목의 몇 칸 없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레오는 그대로 어깨 위에 둔 채였다. 천천히 몰아쉬는 숨소리가 등 뒤를 따뜻하게 만든다. 목을 가눌 힘도 없나. 재프는 그를 앞으로 끌어와선 제 무릎에 앉혀 그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옅은 화상이였다. 이거 따갑겠네….


" 찬물이나 끼얹자. 네 집으로 간다. "

" 집이 어딘지는 압니까. "

" 알고 있지. "

" …알고 있었나요. "

" 불만있냐. "


알고 있었다면…. 하고 레오가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재프는 상관하지 않고. 그를 무릎에 앉힌 자세 그대로 들어올렸다. 자세의 이상함을 깨달은 레오가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다르게 버둥거렸다. 아래로 내려오려는 시도였지만 그의 등허리와 무릎께를 꽉 쥐는 재프의 팔에 제지당한다. 이건, 치마를 입은 여자를 안을 때나 쓰는 것 아닙니까! 하고 말하니, 다리를 다쳤는데 별 수 있나. 하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끄러움은 줄긴 하겠지만. 레오는 재프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여전히.

레오의 집은 조금 먼 거리였다. 주위는 허름한 5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갈색과 회색이 가득한 골목이다.


" 여기 맞냐. "

" 생각보다 잘 찾아오셨네요. 이상한 곳으로 갈 줄 알았더니…. "


나를 뭘로 보냐! 하고 그에게 헤드락을 걸려다가 관두는 재프. 왜 하다 말아요. 하니 환자잖아. 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답안이 되돌아온다. 멋쩍은 분위기에 몇 초간 침묵이 이어진다.


" 일단…. 들어오시죠. "


레오가 절뚝거리며 앞장섰다. 한쪽 다리의 정강이 부분이 조금 그을렸던지 피부가 붉다. 걷어올린 바지가 안쓰럽게 보인다. 계단을 몇 층 올라, 밋밋한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는 레오. 올라오는 도중에도, 잡아줄까. 하고 물었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아무리 자신이 못된 짓을 했기로서니 개미눈깔만큼이라도 의지하는 건 불가능한 걸까. 사람다운 친절은 베풀려고 해도 이러면 곤란했다. 재프는 무안함을 느꼈다. 문득 그의 고양이가 자신을 향해 살짝 뒤로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린 것 같았다.

그의 집 안은 좁았다. 한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한 동선이였지만, 두 사람이 되니 움직일 곳이 없다. 하지만 레오는 그런 상황에서도 잘만 돌아다니며 다리를 찬물묻힌 거즈로 몇 번 닦아낸다. 그가 스읍, 하고 숨을 들이킨다. 화상을 찬물로 닦아내는 데는 느낌이 좋을 리가 없으니까. 재프는 낡은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놓인 그의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를 보았다. 레오는 시선을 다리 아래로 고정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였다. 그리고 재프는 그것을 눈치챘다.


" 설명해줄 수 있냐. "

" …. 뭘 말인가요. "

" 카메라. "


레오가 움찔한다.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 아, 그거야. 혹시모를 대비용이죠. 항상 그래왔던 건데. "

" 왜 알리지도 않고. "

" 그야 폐를 끼치긴 싫으니까요. 여태까지 찍어왔던 걸 발견 못한 게 언젠데. "

" 우리에게 말 한마디 않고 죽어버리는 건 폐가 아니고? "

" 제가 벌린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재프 씨 아닌가요. "


갑자기 냉정해진 레오의 말에, 이번에는 재프가 움찔한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재프가 무심코 생각하던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반박하지 못했다. 말이 없어진 재프 때문인지 레오는 한숨을 쉰다. 그가 인정했다는 것은 레오의 말이 잘 맞아들어갔다는 것일 테니까.


" 이제 가셔도 되니까.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재프 씨. "


묘하게 예의를 차린 말투다.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건가? 재프는 심기가 불편하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멱살을 잡아 탈탈 털어버릴까. 하지만 또 화내겠지? 재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앉아있던 낡은 매트리스 위에 그대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상관없다는 체로 계속해서 거즈를 짜고, 닦아내고, 하던 레오는 몇 번 더 그것을 반복하다가 신경질적으로 거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가시라니까요. 그의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웠다. 위협이자 자기방어다.


"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 "

" 안 됩니다. "

" 왜. "

" 재프 씨에게 제일 들려주면 안 되는 이야기니까. "


의외의 전개다. 재프는 자세를 숙여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바닥과 그리 떨어진 높이가 아니라 레오가 고개를 들면 바로 정면이 보일 만한 거리다. 재프가 레오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 그게 무슨 소리냐. "


자신에게 더더욱 들려주면 안 되는 거라니. 내가 그걸 들으면 깽판이라도 칠 줄 아는 건가. 그 정도라면 자제할 수 있다. 물론 그 정도의 일이라면 험한 욕지거리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라고 재프는 생각한다.


" 내가 화 낼 만한 일이라면 바깥에 나가서 낼테니까. "


그게 조절이 되겠느냐마는. 레오는 그제서야 재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양옆으로 젓는다. 얘기할 수 없다는 건가? 재프의 눈이 가늘게 떠 진다. 아니, 다른 겁니다. 하고 레오가 입을 열었다.


" 화를 낼 만한 정도는 아니고. 짜증 날 정도. "

" 그럼 그냥 말 해. "

" …. "


또 침묵이다. 다시 레오는 고개를 숙였다. 문득 그의 눈이 평소보다 더 꽉 감겨져 있었던 것은 기분 탓일까.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을 더 꽉 쥐었다. 으윽, 환자한테 이러기예요? 하는 말에 힘을 도로 뺐지만.


" 생각 좀 정리하고…. 된다면, 내일 말할게요. "

" 어디에서? "

" 라이브라로 가는 길 도중의, 최대한 엿들을 사람이 없는 곳에서. "


그렇다면 가는 길 중간의 쓰이지 않는 골목길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이였지만 그 건물이라는 게 이제 폐건물이 다 되어갈 정도로 낡은 데다, 바깥으로 뚫린 창문도 없어 밋밋한 벽이 골목 양 옆을 싸잡고 있는 그런 형태였다. 높이도 꽤 높아서 낮에도 어둑어둑한 곳이라 사람들은 그 골목을 잘 쓰지 않았다. 쓴다고 한다면 가끔 돌아다니는 겁 없는 꼬맹이들일까. 의외로 라이브라로 가는 길의 지름길이라 애용하는 곳이다. 그런가. 그 곳에서 이야기할 생각인가. 레오의 어깨에서 천천히 손을 뗀 재프는 손가락질하며 단단히 약속했다.


" 그럼 항상 네가 기다리던 곳에 있으라고. 나올 테니까. "


레오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내팽개친 거즈를 주워 다시 대야에 적셨다. 그의 고양이는 오늘따라 더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무언가에 싸여 있었다. 답답한 상자에 독극물과 함께 갇힌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렇게 언제 먹을지 모를 독을 옆에 두고 불안해하며.


재프는 눈을 떴다. 어라. 언제 집으로 돌아온 거지. 아니, 여기는 집이 맞나. 익숙하지 않은 곳이였다. 아니, 집이 맞구나. 항상 여자들과 지내 온 그로써는 아무도 없이 적적한 집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시계가 어디 있더라. 휴대폰, 어디…. 아침이군.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게 얼마만이지. 이불을 걷어차 올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 흐어엄. "


멋빠지게 하품을 했다. 어제는 피곤한 하루였지. 오랜만에 호무라마루도 꺼내고 불도 지펴 보고…. 아, 맞다. 음모 머리. 지금은 막 해가 뜬 오전이다. 시간은 넉넉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걸어가 그가 항상 있던 곳에서 기다리면 어떨까. 늦게 온 녀석한테 어제 그 이야기의 정보를 좀 더 넘겨줘야 되겠다며 헤드락이나 걸까. 좋아, 결정. 간단한 레퍼토리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차마 실현되지 못했다. 아침 일찍부터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은 여전히 레오다. 재프는 그를 발견한 즉시 성큼성큼 걸어가선 그의 앞에 발을 구르며 섰다.


" 왜 이렇게 빨리 와 있냐. "


짜증과 빈정이 섞인 말투다. 내가 장대한 계획을 품고 왔더니, 다 망쳐버리다니. 사실 그리 커다란 계획도 아니였지만. 그는 왠지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그의 우울한 분위기에 취해 도리어 화내지못했던 어제의 자신이 답답했었으니까.


"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

" 뭐? "

" 항상 기다리던 대로 하라면서요. "


항상 기다리던 대로 했다면…. 그는 언제나 아침 일찍부터, 이 곳에 서 있었다는 걸까. 재프는 새삼 평소의 자신이 상당히 양아치스러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레오 이 새끼…. 학교 다녔으면 나한테 다구리 맞을 상이네. 그에게는 실례되는 생각이였으니 재프는 그 뒤로 침묵했다.


" 그럼 갈까요. "

" 으음… 그래. "


재프는 석연치않은 기분으로 먼저 출발하는 그를 따랐다. 오늘은 소닉이 없네. 미리 가 두라고 시킨 건가. 재프는 귀를 후벼파며 이것저것 상상을 한다. 그가 이야기하기로 한 골목은 여기서 조금 머니까, 뭔가 생각이라도 미리 해두고 대비할까. 하는 마음이다. 어디보자, 자신이 짜증날 만한 일이라면 딱히 없는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눈에 대해서 조금 더 깊숙하게 생각해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럼 생각을 바꾸자. 어제 보니, 의안을 능숙하게 다루었지. 여태껏 모르는 새에 훈련이라도 한 걸까?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집중할 때 쯤, 커다란 벨소리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온다. 우왁, 뭐야. 주머니에서 급하게 빼내다가 떨어뜨릴 뻔 했다. 다행히 무사히 손에 안착한다. 레오가 피식 웃으며 재프를 돌아본다. 재프는 혀를 쯧 하고 차 보인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전화를 연결한 후 귀에 대었다. 흘러나오는 무거운 목소리는 크라우스. 나리다.


" 재프인가. "

" 무슨 일이야, 나리. "

" 오늘은 조금 급하게 와야 할 것 같네. 저번의 박물관 도난사건 기억나나. 그 쪽 일당을 잡았는데, 대치중이라더군. 저번에 몰아세웠던 그 골목 쪽으로. "

" 박물관…. 아. 그때 그놈들. 어떻게 잡았대, 귀찮게…. 금방 갈 테니까. "


급했던지 줄줄 말하는 크라우스. 레오는 재프의 앞에 서서 가만히 전화내용을 듣는다. 표정이 굳었다. 이야기하는 걸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재프가 휴대폰에서 귀를 살짝 떼고, 그에게 고개를 가로로 저어 보였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한다. 표정이 영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 이거야 원, 그럼 오늘 집에 가는 길로 미뤄도 되겠냐. "


아직 점심 때도 안 됐는데 말이지. 일 끝나면 배고프겠구만. 느긋한 재프의 말에 왜인지 레오는 반응이 없다. 대답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이것도 물어볼까. 아니, 지금 주의를 주는 게 좋을까. 표정이 조금 구겨진 것 같아서.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들려달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 때 물어본다면 다 말해주겠지. 그의 고양이의 꼬리가 곤두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 그럼 갈까. "

" 어딜요… 으아악?! "

" 어디긴. "


재프는 레오를 짐짝처럼 한쪽 팔에 꿰어 들었다. 그리고 날듯이 뛰어 달린다. 박물관 그 새끼들을 얼른 조져두고, 일찍 퇴근하면서 들어야겠다. 하고 결심했으니 당연하다. 레오는 한 쪽 손으로 재프의 허리를 붙들고, 다른 쪽 손으로 재프의 팔을 꽉 붙잡는다. 이제는 그가 나에게 조금 의존하는 걸까. 아니, 그냥 무서워서 그런 거다. 재프는 혼자 반론하며 속으로 웃었다. 착각은 금물이지. 아직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털어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장소에는 금방 도착했다. 이 골목에서 세 블럭 정도를 걸으면 시장이 딸려 있는 엄청난 번화가지만, 이상하게도 박물관 일당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골목은 적막하고 쓰레기가 넘쳐났다. 마치 소설 속의 뒷골목이라고 해도 적당할 것 같은, 영화 촬영지 같은 장소다.


" 어느 쪽이냐, 레오. "

" 저 쪽 벽 넘어서, 왼쪽으로 꺾어요. "

" 오케이. "


레오가 눈을 살짝 떠 푸른빛을 보인다. 재프가 묻자마자 곧바로 답했다. 오늘은 정보처리가 빠른데. 하고 중얼거리니 레오는 어쩌다 보니까요. 한다. 그가 말한 대로 곧장 가 보니, 과연. 경찰이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고, 나리가 중간에서 그 박물관 놈들과 마주보고 있다. 레오를 내려놓고 경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들을 훑어보니, 이상했다. 저번의 도난범들과 다른데. 그 놈들은 휴마였고, 이번엔 이계인들 투성이잖아?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런….


" 어라. 어제 놓친 의안 휴마잖아? "


도난범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꾸물거리는 손을 움직여 삿대질로 레오를 가리키는 한 이계인.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이계인의 옆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서 조금 발언권이 높은 녀석인가. 그 이계인이 내 보이는 손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지만, 뼈가 없는 것 같이 뭉툭하고 깊게 구부러졌으며 물렁하게 보였다. 질기고 축축한 젤리라고나 할까. 얼굴과 몸 생김새는 마치 프랑켄슈타인 같아서 분장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레오는 황급히 경찰들의 뒤에 붙어 숨는다. 의안이라고? 그게 뭐지. 경찰들은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삿대질의 끝인 레오를 힐끔 돌아본다.


" 지금 보니…. 어제 태웠던 것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


재프는 문득 눈치챘다. 어제 레오에게 송곳을 겨누었던 이계인. 그리고 기분나쁜 사내의 들끓어오르는 목소리. 조금 퍼즐이 맞춰지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조각만이 있을 뿐, 틀은 잡히지 않는다.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는 호무라마루를 꺼내들었다.


" 오늘은 불로 폭팔시켜버리면 되려나. "


도발적인 말을 해 본다. 물론 말 대로 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보는 눈이 이렇게 많으면 안 된다. 대강대강 싸워서 제압해 둬야, 감옥에 쳐넣든 심문을 하든 해서 그들이 훔친 그 비싼 고가품을 찾아야 될 게 아닌가. 재프는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귀찮아. 크라우스가 재프에게 신호를 준다. 크라우스의 능력은 대단한지라 혼자서 모두를 제압할 수야 있었지만, 만일을 위해 재프를 부른 것이니까. 재프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다음 신호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크라우스가 순식간에 돌진해, 그들 눈 앞으로 직진할 때였다. 위기감을 느꼈던지, 그들이 우왕좌왕 하는 중에 우두머리 사내가 입을 연다. 크라우스의 주먹이 그들의 머리 위를 꿰뚫기 직전이였다.


" 우리를 박물관에 들어가게 한 것은 저 의안이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

" 무슨…? "


크라우스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태세는 당장이라도 공격이 가능한 준비자세지만, 일단은 멈춘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뒤로 돌아 레오를 바라본다. 어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재프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일 났네. 하고 당황한다. 레오가 식은땀을 흘리는 게 멀리서도 보일 것 같다. 물론 자신도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아주 조금 연관성을 아는 이상은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바로 이간질시키자. 재프는 일부러 크게 한숨소리를 내었다.


" 후아…. 낡은 수법을 써 먹네. 안 지겨운가? 나리, 저거 사기니까 믿지 말고 얼른 조지자구요. "

" 아, 그런가. "


크라우스는 빨랐다. 대답도 행동도. 워낙 저들보다 재프를 신뢰하는 마음이 굳건해서 그런지 그 한마디에 별 망설임도 없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긴 게 다행이라고 재프는 생각했다. 이계인들은 신나게 피떡이 되어 쓰러져가고 있다. 장관인걸. 호무라마루를 넣은 뒤 팔짱을 끼고 구경하다가 문득 레오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레오가 머뭇거리더니, 꾸벅하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감사인사인가. 피식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딱히 내가 잘 한 건 없는데. 이야, 나리는 엄청 힘내고 있구나. 신나구만. 재프는 느긋하게 경찰차로 가서 걸터앉는다. 그렇게 사태는 모두 끝났다. 의외로 싱거운 끝이다.


" 가죠. "


레오가 재프에게 말한다. 경찰차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이계인들을 끌고 간 지 오래였고, 이제 이 골목은 다시 적막하다. 고함 소리는 그쳤다. 그 이계인들의 꾸물거리는 이상한 액체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고 고요하다. 크라우스는 그들을 자신이 때려눕혔으니 마지막까지 봐야 한다며 경찰들을 따라갔다. 재프와 레오, 둘 뿐이다. 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그늘이 져서 그런가. 재프는 레오를 쳐다보며 눈을 치켜뜬다. 어딜 가자는 거야?


" 저희 집으로. 가면서 이야기 해 드릴게요. "

" …. 그래. 궁금해 죽겠다. "


분명 이 골목에서 그의 집으로 가려면 시장과 반대쪽이다. 깊숙히 들어가 번화가 직전에서 빠져, 다른 골목으로 건너가야 할 테지. 딱히 보는 사람은 없겠는걸. 뭐, 의안이라면 시선 정도는 다 처리할 수 있겠지만. 재프는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앞장서 걷는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재프를 레오가 종종 빠른걸음으로 따라가 옆에서 걸었다. 몇 블럭 정도를 침묵하고 걸었다. 입이 쉬이 떼어지지 않겠지. 이렇게 시간을 많이 끌었는데. 슬슬 물어볼까. 하고 재프가 고민하던 차에 레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처음엔 그냥, 여동생에게 눈을 되돌려 주고 싶었어요. "

" 어어…. 그건 다들 알고 있지. "

" 그리고 그 바람이, 지금은 조금 왜곡되었다고 생각해요. "

" 음? "

" 의안을 바쳐서 미쉐라의 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죠. "


그러니까…. 말인즉슨, 시각을 포기하고 눈을 아주 뽑아버릴 기세였다 이 말이잖아? 독하네. 재프는 감탄했다. 여동생을 그만큼이나 아끼고 있다니. 그래,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레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그래서 저는 정보상에 손을 댔죠. 며칠 있으니, 제안이 왔어요.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와 적당한 돈을 지불한다면 제가 원하는 정보를 주겠다고. 일주일 전 쯤이죠. "

" 아. 그러면 그 때 상처는…. "

" 잠시 급료가 높은 일을 했더니 사고가 많아서. "


막노동이라도 한 건가. 비리비리한 자식이 힘이 어디 있다고. 어딘가에서 떨어져 죽지 않은 게 퍽 다행이였다. 재프는 앞에 있던 얄궂은 돌멩이를 힘껏 차 올렸다. 돌멩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구른다. 제 기분처럼 쭉 떨어진다.


" 그래서, 돈은 마련됐고? "

" 돈은 잘 됐어요. 정보가 조금 문제였죠. "

" 어떤 거였는데. "


재프의 물음에 레오의 말문이 막힌다. 아, 이건가. 이걸 말하기 싫은 거였나. 들으면 화낼 만한 거라는게 이걸까. 슬슬 그의 행동과 생각이 예측되기 시작한다.


" 말 해도… 되나요. "

" 어제부터 각오는 하고 있으니까 말 해 봐. "

" …. 박물관의 물품 보관 장소랑. 카드 키 습득 방법하고. 음…. 고가품 관람 동선. "


손가락을 소심하게 하나씩 하나씩 꼽으며 자신이 조사한 내역을 천천히 읊는 레오. 도난 위주의 범죄자들이 얻기에는 상당히 질이 높은 정보다. 왠만큼 큰 건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세하고 수준높은 정보를 얻을만한 돈도 못 벌 테니까. 그거 대단한걸. 그래서… 어라.

재프는 요즈음 자신이 눈치가 빨라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오늘 사태도, 저번의 박물관 도난 사태의 원인도 그였다. 엄청난 연계성이다.


" 그걸 얻을 수 있긴 한거냐? "

" 의안을 써서요. 기왕 없앨 거면 알차게 쓰자 싶어서. "

" 이거야 원…. "


그 다웠다. 재프는 뒷목이 당겨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 돈도 보냈고 정보도 줬고, 재프 씨가 박물관으로 갔던 날 짐작했죠. 그들이 정보를 썼으니 연락이 올 거라고. 정확히 그날 밤 12시에, 편지가 문 아래로 들어왔죠. "

" 디지털 시대에 고전적인 수를…. 그래서 내가 몰랐던건가. "

" 네. 재프 씨가 저를 따라다니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

" 엉? "


역시 알고 있었던 거냐. 짐작하고야 있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그랬다면 괜히 멀찍이서 그를 봤다며 후회한다. 차라리 대놓고 옆에 끼고 다녔다면 뭔가 간간히 언질이라도 받았을 텐데 말이지. 재프는 혀를 찼다. 쳇.


" 미행이 있다고 하니, 거래를 하려면 따돌리고 오라고 했죠. 느낌이 쎄하더라고요. 그래서 소닉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카메라에 저장된 그 영상은 그날 밤에 녹화한 건데, 그들이 줄 정보가 진짜라면 꼭 필요할 것 같아서였어요. 저는 정보를 받은 후엔. 그게 어떤 범법행위이든지 바로 시행할 생각이였으니까. "

" 그런데 이 사단이 났다 그거지. "

" …네. 송곳으로 직접 뽑으려고 할 줄은 몰랐는데. "


레오는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그 표정이 마치, 멍하게 허공의 먼지를 보는 고양이같아서. 그가 이제 곧 울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그리고,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 이놈도, 저놈도…. 물론 사기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게 엄청 짜증나서. "

" …. "

" 미쉐라에게…. 미안… 해서. 그러니까…. "

" …. "

" 죄책…감이란 게…. "

" 안 참아도 된다. "


레오가 말을 멈추었다. 천천히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숨을 참는가 싶더니 떨리는 호흡을 내쉰다. 재프는 그를 토닥여주었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이젠 훌쩍거린다. 간간히 욕하며 소리를 내는데, 울음에 묻혀 뭉개진다.


" 내가… 흑, 원하던, 게… 이, 이런 건… 아니였는데…. "

" 안다. "

" 으, 으으… 나쁜, 새끼들…. "

" 그래. 개새끼들이지. "


맞장구를 쳐 가며 그를 달랬다. 레오는 처연하게 울었다. 너무 높은 곳에 원하는 것이 있어 울고 있는 고양이처럼 애달프고 구슬펐다. 그의 목에서 울리는 울음이 재프의 속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프는 레오를 달래듯이 끌어안았던지도 모른다. 레오는 끊임없이 그의 품에서 울었다. 한참을 그랬다. 오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프는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레오는 쉴새없이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다. 여태 쌓였던 게 많았나. 재프는 그가 불쌍해졌다. 아니, 불쌍하게 보였다기보단 더더욱 안타까워진다.

사연은 항상 알고 있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여동생을 위해 이곳에서 방법을 찾는 도중이였건만, 왠 이상한 놈을 만나 여동생의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고 자신은 신의 의안같은 이상한 걸 얻어 한동안 어지럼증을 호소했다지. 원하지 않은 얻음이였으니 그가 의안을 쓰는 것을 별로 내키지 않아할만 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도 포함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때 쯤 재프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저는 이제, 뭘…. 뭘 하고 살아야, 할지…. "


여전히 레오는 울고 있다. 이거. 그치게 해야 할 텐데. 재프는 위로하는 것에는 서툴렀다. 간간히 딸꾹질을 해 대는데, 보기 힘들었다. 그만 울어라. 한 마디를 하려는데 오히려 그가 더 울 것만 같으니까. 재프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갖다 대었다. 촉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무난하게 한 마디 날린다.


" 괜찮아. "


레오에게는 딸꾹질만 남았다. 눈물은 여전히 흘렀지만, 끊임없이 말하던 목에 무언가 턱 걸려버린 듯 놀란 눈으로 재프를 올려다본다. 딸꾹.


" 괜찮다고. "

" …. "


재프는 레오의 눈을 피했다. 아. 지금 내가 뭘 한거지.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했더니 이 꼴이다. 뭔가 이 분위기를 깨뜨릴 만한 게 없나. 고민하다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있는 그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 새꺄. 집으로 가자.

레오의 눈물은 그를 업고 온 재프가 그의 집에 도착할 때 쯤에야 사그라들었다.


" 미안하네요. 여기까지. "

" 알고 있네. "

" 아 뭐가요. "


이제 좀 제 성격으로 돌아온 것 같다. 알고 있긴 뭘 알아요. 하며 팔꿈치로 제 허리를 꾹 찌르는 그가 그제서야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 기뻤다. 문득 생각나는 궁금증에 재프가 물었다.


" 그런데 네 말을 들으면 내가 화낼 것 같았다는 건 뭐야. "

" 그 때 라이브라에 가면서 이야기했던 게 있잖아요. 뭐…. 생각해보니 별로 화낼 만한 건 아니지만. "

" 뭔데. "

" 결론적으로 고생한 건 재프 씨니까요. "


아. 그건 맞긴 하네. 재프는 수긍했다. 물론 자신은 어딘가에 대놓고 나서길 싫어했다. 여러모로 귀찮았고, 그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녀석들 삥을 뜯거나 경마장에서 돈을 써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덤으로 술도 마시고 여자도 주무르면… 항상 숙취에 시달리지만 돈을 잃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좋았다. 그래도….


" 너 때문에 그런 건데 화낼 건 없지. "

" 아…. 저 때문에. 흠. 네? "


갑자기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방금 재프의 말은 의미심장했기 때문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 의문을 제기했다.


" 어, 그러니까…. 제가 아니였으면 화냈을 거란 말인가요? "

" 음. 그렇게 되지. "


재프는 선선히 대답하며 침대에 풀썩 앉았다. 레오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멍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재프는 생각한다. 아, 오늘이 말하는 날인 건가. 간질간질한데. 자리는 일단 마련된 것 같다만….


" 넌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


그의 손목을 잡아 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뭐, 뭔데요. 하고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해서 즐겁다. 이 정도 티를 냈으면 알아줄 법도 한데. 그의 고양이는 항상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 인마, 나는 좋아하는 놈 아니면 안 따라다녀. 예전엔 안젤리카한테도 끈덕지게 따라붙었었으니까. "

" 어…. 지금 상황판단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놔 주시… "

" 음? "

" …지 않을 거 같네요. "


레오는 잡힌 팔을 당겨 재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헛수고다. 억센 손아귀는 펼쳐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재프가 피식 웃으며 마주보자 일찌감치 포기해버린다.


" 그러니까 재프 씨는 지금, 저랑 안젤리카 씨를 비교하는 건가요? "

" 비교라기보다는, 동질화지. "


레오의 눈이 살짝 떠진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인다. 푸른빛이 그의 눈꺼풀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나왔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티가 안 났나. 재프는 가만히 고민하고 있는 그를 쳐다본다. 그의 눈이 의안이 아니였다면 떨리고 있었을까.


" 이해되는 것 같냐. "

" 아주 조금. 언제부터요? "

" 몰라. "


깨달은 건 최근이지만. 재프는 곰곰히 생각해본다. 아마 그의 속에 있는 고양이를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을때일지도 모른다. 날카로우면서도 사려깊고, 새침하면서도 어딘가 모자람이 언뜻 보이는 고양이. 서두에서도 말했다시피 말이다.


" 그래서 지금 팔을 잡고 있는 의의가 뭔가요. "


재프가 눈썹을 살짝 올려보인다. 그리고 픽 웃는다. 다른 쪽 손으로 말없이 그의 턱을 잡아당겼다. 그의 푸른 의안이 자신과 마주 본 채로 멈췄다. 레오의 숨결이 코끝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레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천천히 그에게로 얼굴을 기울였다. 입술을 조심스럽게 마주대었다.

레오는 그를 밀어내는 듯 싶었지만, 아주 조금 힘을 주려다가 말았다. 진심이 느껴져서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그런 행위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처음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레오는 그를 받아들였다.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약간 벌렸다. 틈을 타고 들어가 살짝 아랫입술을 씹는 재프. 레오는 조금 놀랐지만, 그러려니 하며 입을 다문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민감한 곳은 의외로 입 속의 혀라고들 하지 않던가. 레오는 그것을 실감했다.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물렁한 감각과 맛이 입 안을 맴돈다. 숨은 점점 쉬기 힘들어지고, 절로 벌렸다 다물었다를 반복하게 된다. 재프는 능숙하게 자세를 돌렸다. 손은 레오의 뒷목을 지탱하고 있었고, 여전히 팔을 잡고 있다.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간다. 구석을 훑으며 다시 돌아와 혀를 휘감는다. 고개를 약간 돌려 조금씩 빨아당기더니, 이내 얼굴을 떼었다. 레오는 그제서야 막혔던 숨을 내뱉었다. 입안이 허전해진다.


" 이게 의의. "

" 와…. 대단도 하시네요. 나 처음인데. "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딱히 기분나쁜 표정은 아니다. 재프는 솔직히, 처음 시도했을 때 아차 싶었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면 조금 영광인것 같기도. 하고 생각한다. 제대로 호흡하질 못해 붉어진 양 볼에다가, 항상 뜨지 않던 눈을 커다랗게 뜨곤 내가 뭘 했나. 하고 멍하니 있는 그가 눈 앞에 있었으니까.


" 있죠. "

" 엉. "

" 생각을 좀 해 봐야 될 것 같으니까…. 내일 와 주세요. "

" 오지 말라곤 안 하네. "


그러게요. 딱히 게이에 대한 혐오감은 없으니까. 레오는 머리를 긁적인다. 고민의 여지를 주는 걸까. 혹시 자신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재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념하고, 그럼 갈게. 하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니, 내일 봐요. 한다. 그의 집 문을 나서며 뒤돌아보면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레오. 진짜 고양이 같다. 하고 생각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스코티쉬 폴드. 귀가 접혀 있는 순한 인상의 고양이.

그의 기분은 지금 어떨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의외로 신경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던 것들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는다. 집에 가는 길. 바람이 분다. 그에 대한 것이 머릿속을 헤집듯이, 바람이 머리카락을 치고 간다. 오늘 밤은 빨리 지나갈 것 같구만.

그는 눈을 감았다.

삐리릭 삐리릭. 전화다. 받아야 하는데. 눈이 잘 떠지질 않아.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들어 확인한다. 전화가 아니네. 알람이다. 젠장, 더 잘까…. 아니, 아니야.


" …. 일어나야지. "


멍하게 침대 위에 앉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 지금 나가버릴까. 왠지 평소엔 쓰지도 않던 알람을 맞춰 뒀더라. 나 답지 않군.


" 어휴…. "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레오나르도 워치. 곧장 생각나는 그 이름. 그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틀 연속으로 일찍 일어나다니, 그로써는 별일이다. 아침이나 먹을까. 가까이에 있는 서랍을 열어 전단지를 뒤적인다. 하나 집어 들어올렸다. 피자 가게. 어디, 피자 번호가…. 아, 레오가 배달 다니던 곳이다. 그 땐 엄청 귀찮아했었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그를 귀찮아하지 않게 된 건.

이왕 이렇게 된 거 전화나 해서 확인할까. 혹시 아직 자고 있으면 천천히 나가야지. 톡, 톡. 휴대폰을 두드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연결음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 일어났냐. "


딸깍, 하고 누군가 전화를 받자마자 묻는다. 상대방은 몇 초 침묵하다 대답한다.


" 그냥 지금 말해도 될 것 같네요. "

" 아니, 천천히 말해도 되는…. "

" 말하고 싶어서요. "


쎄한 기분이 들어 그만두라고 하려 했지만, 그대로 치고 들어온다. 괜히 전화했나, 봉변이다. 마음준비라도 할 시간이 있어야 됐는데. 그냥 '네' 정도로만 끝날 걸 잘못 건드렸나. 혹시 그가 욕이라도 할 생각인걸까.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배로 느껴진다. 귓속을 둥둥 울린다. 그 뒤로 레오가 꺼낸 말은 더더욱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언젠가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

" …. "

" 제가 가만히 있었던 걸 보면 은근히 저도 마음이 있었던 것 같고. "

" 그럼…. "

" 일단은. "


레오가 말을 끊는다. 스피커 건너편에서 심호흡을 하는 기색이 들린다. 일단은 뭐? 재프도 덩달아 침을 삼킨다.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그대로 마이크로 전달될 것만 같았다. 급한 심장이 혼자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다.


" 좋아해요. "


억지로 쥐어짜내는 소리같기도 했다. 무안해서인지 그가 덧붙였다.


" 어쨌든…! 잘 지내 보자구요. "


무안했던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어라. 진짜 된 건가. 여전히 재프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채였고, 손에는 피자가게 번호가 적힌 광고용지를 들고 있다. 된 건가? 지금 들은 게 꿈이 아닌 건가? 시간을 확인하니 일어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다리만 내려 두고 구부정한 자세로 방금 한 대화를 곰곰히 생각하는 참이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이런, 누구지. 나가 봐야….


" 매번 감사합니다, 피자 배달 왔습니다. "


인터폰 너머에서 들리는 전형적인 인삿말에 온 몸의 기능이 멈췄다. 지금 가장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급하게 버튼을 눌러 현관을 열었다. 피자를 든 그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 앞에 서서, 말한다.


" 오는 길이였는데 전화하면 의미가 없잖아요. "


놀라게 해 주려고 했었는데.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재프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왁, 부딫힐 뻔 했잖아요! 하고 뒷걸음질 치는 레오를 향해 달려가 감싸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는다. 피자박스는 레오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다. 레오가 천천히 재프의 등을 감싸안고, 토닥였다. 어제의 자신을 달래주던 재프의 손길처럼.


" 사랑한다. "

" 언제 그만큼 진전된거예요? "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레오가 하하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 고마워요. "


피자 다 찌그러졌어요. 들어가죠. 아이를 어르는 어른처럼 레오는 재프를 달랬다. 재프는 울고 있는 것은 아니였지만, 벅찬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느낌이 온다면 무작정 밀고 들어가는 그였기에 자기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법도 했건만, 잘 일단락된 것 같았다.

항상 등과 꼬리만을 보여주며 애타게 했던 레오의 고양이가, 드디어 그 푸른 눈을 자신에게 맞춰 주었다.

재프는 그것이 감격에 겨울 뿐이다.


둘의 고양이가 코를 비볐다. 이것이 영원할 것처럼, 진하고 사랑스럽게.






fin.

Posted by MD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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