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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센조 <- 아야베 키하치로]


함정은 언제나 그곳에







내가 당신에게 반했던 것은 언제였던가.

아야베는 그늘진 함정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천천히 생각해보자. 물론 당신은 언제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하얀 피부에, 날렵한 몸놀림. 그리고 친절함과 남자다움을 겸비한, 가히 천재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

물론 6학년이라면 그런 사람은 널렸지만 말이다.


" 왜일까…. "


아야베는 그대로 누워 버렸다. 시선 끝의 벼랑에 꽃이 피어 있다. 마치 선배를 닮은 새하얗고 가느다란… 그런 꽃이다.

그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함정 속의 흙 내음과 함정 바깥의 바람소리가 느껴진다. 머리 뒤로 깍지를 낀 뒤 쭈욱 몸의 힘을 뺐다. 오래지 않아 천천히 눈을 뜬다. 여전히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새하얀 꽃.


그 선배도 저 꽃처럼, 계속 한 곳에 있어 주실까.


조금 울적해진다. 손을 위로 뻗어올려보았다. 눈에 아른거리는 흰 빛깔이 뼈에 사무치도록 슬펐다.


닿지 않아.


그는 영원히 닿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아야베는 뱃속 깊숙이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에 대해 이리 정의하는가.

입을 가렸다. 불순한 의도의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 …. "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보면, 어느 새 노래지고 있다.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아야베는 옆에 세워 두었던 후미코를 잡고 일어났다. 함정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야베는 멍하게 서서 함정의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오늘은 누가 올까.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후미코를 꼭 안은 채 쭈그려 앉았다. 다시 눈을 감고, 이번엔 뒷산 주위의 풀 내음새를 즐겼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키하치로! "


아아, 왔다.


아야베는 살짝 웃었다. 함정에서 보이는 그 동그란 하늘구멍으로 센조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아야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나즈막히 대답했다.


" 네- 선배-. "


몇 번의 발소리 이후 그의 얼굴이 하늘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토나이는 이 아래서 몇 번을 불러도 제대로 찾질 못했었는데. 역시 실력의 차이인 걸까. 아야베는 물끄러미 센조를 올려다보았다. 센조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 찾아다녔다, 키하치로. 작법위원회의 회의를 해야지. "

" 벌써 시간이 그리 됐나요. "


아야베는 센조가 뻗은 손을 잡았다. 감각이 손의 마디마디를 타고 전해져온다. 보록화시를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 그 손바닥에서 다섯 갈래로 퍼져나온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거세게 감싼다. 아야베는 그 작은 동작을 하나씩 하나씩 눈에 담았다. 팔목에 살짝 오른 힘줄이 소매 너머로 얼핏 보인다. 함정 바깥으로 끌어올려지는 아야베. 별다른 사고 없이 가뿐하게, 편평한 땅 위로 올라온다.


" 그럼, 갈까. "

" 오오-…. "


후미코를 살짝 들며 대답했다. 습관이다. 센조는 그런 그를 흘긋 보고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의미일까. 아야베는 머리를 굴렸다. 귀여운 후배를 보는 눈빛인가. 자신이 방금 했던 행동을 묵묵하게 다시 한 번 더 해본다. 후미코를 살짝 들어올렸다가, 내린다. 으음. 별로 귀여워보이진 않을 텐데. 아야베는 몇 차례 더 혼자서 시도해보다가, 관두기로 하고 얼른 센조의 뒤를 따라갔다.

센조는 벌써 저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그의 자취를 뒤쫒았다. 앞서가는 센조의 뒷모습이 어느새 벼랑에 피어 있던 흰 꽃과 같아 보인다.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가슴에 가만히 대었다.


" …. "


의미없는 짓이다.

나는 그를 품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을 텐데. 자꾸만 손이 간다. 그의 옷깃을 잡고 멈춰서게 한 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시도도 할 수 없었다.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을 뿐더러,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멀리 가 있었으니까.


아야베는 얌전히 인술학원으로 돌아왔다. 생각했던 건 많았지만, 하나도 시도해보지 못했다. 그저 뒷모습만 쫄래쫄래 따라와버려 안타까웠을 뿐.


" 아, 오셨네요, 선배. 회의는 곧바로 시작인가요? "

" 헤이다유와 덴시치는? "

" 아마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토나이다. 1학년들은 이미 들어가 있는 건가. 아야베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았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토나이와 대화하는 타치바나 센조.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려, 뒷목이 드러났다. 다른 곳보다 더 새하얗다. 조금 삐져나온 머리카락들이 투명한 베일처럼 그의 피부를 덮는다.

아야베는 후미코의 대를 꽉 쥐고 센조의 옆으로 걸어갔다. 토나이가 아야베를 보고 웃었다.


" 아야베 선배! 어디까지 가서 함정을 파고 계셨던 거예요. 한참 찾았는데. "

" 뒷산-. "

" 뒷산…. 그래서 찾았는데도 없었구나. 오늘은 꽤 멀리 가셨네요. 얼른 들어가죠! "


토나이는 아야베와 센조를 끌었다. 오늘 회의의 예습은 확실하게 해 뒀으니까 빨리 시작해요! 하는 그가 꽤 귀엽다.

아, 선배가 느끼는 나에 대한 감정도 이런 것일까. 문득 생각한다. 센조의 얼굴을 보니 방금 자신에게 어렴풋이 지어 주었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조금 올라간 입꼬리. 그윽하게 아래를 바라보며 휘어진 눈매.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꽉 찬다. 휘날리는 머리카락 한 올마저 신경쓰였다. 아야베는 다시 토나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이상 그를 보고 있자면 얼굴을 붉혀버릴 것 같아서.


" 일단 첫 번째는 언제나처럼 예산 문제다. 피규어의 관리는 매일 잘 되어가고 있지만 낡은 피규어의 처리가 관건이야. 계속 아야베의 함정에 파묻기에는 문제가 많기도 하지. 얼마 전에는 묻어 둔 피규어를 누군가가 발견해서 소동이 났었으니, 인술학원 밖에 두기는 위험하다. 학원 내가 넓으니 좋은 장소를 찾아서 묻어 두고, 그 뒤에는 태워버리거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


아야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다른 후배들도 같았다. 그가 하는 말을 그저 들을 뿐. 반박할 거리도 없었으며, 완벽했다. 타치바나 센조의 삶은 언제나 완벽했다. 물론, 그가 언젠가 말했던 1학년들을 빼면 말이다. 아마… 통통한 아이와 항상 민달팽이 항아리를 들고 다니던 아이. 그 둘과 엮이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며 충고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답지않게 언성을 높히며 인상을 쓰는 그의 모습은 신선하고 새로웠지. 그 아이들이 얼마나 눈치가 없었으면 이 선배를 이렇게 화나게 할 수 있었을까. 눈썹 한 쪽을 치켜올렸다.


" 오늘 회의는 끝. 다들 돌아가도록. "

" 수고하셨습니다! "


센조의 단호한 목소리와 후배들의 목소리가 퍼뜩 그를 깨웠다. 아야베는 딴생각을 하던 중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회의는 이미 끝났고, 다들 부산스럽게 제 물건을 챙기는 중이였다.


" 좋아, 그럼 남은 피규어들을 손질하러 가자. 키하치로. "


어떤 대화가 오갔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아야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 가서 그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것. 항상 똑같은 순서였다. 그가 지시하는 피규어를 찾아 전달한 뒤, 옆에서 천 따위로 먼지를 닦아내고 피규어의 화장을 고치는 것을 도와준다. 오늘도 같았다. 어두운 창고 속에서 한 개의 촛불에 의지해 집중하는 타치바나 센조의 모습은 경건해보이기까지 하다.

아야베는 피규어를 살펴보며 곁눈질로 센조의 얼굴을 관찰했다. 조금 찡그린 눈, 옆볼을 타고 내려오는 작은 땀방울. 꾹 다문 입. 붓을 잡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놀림. 그 모습이 창고의 어둠과 촛불 빛에 섞여 그림자가 진다.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보였다. 예쁜 얼굴.

아야베는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보고 있자니 자꾸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어. 아야베는 눈을 내리깔았다.


" 타치바나 선배. "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꽉 쥐고 있던 피규어에 입김을 불어 먼지를 날린 뒤, 고개를 이 쪽으로 돌린다. 찡그리고 있던 눈을 편 뒤 묻는다.


" 음? 무슨 일이냐. 키하치로. "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팠다. 깊고 낮게 울리면서도 상냥하게 속을 간질이는 목소리.

아야베는 들고 있던 도구들을 보여주며 물었다.


" 이 도구들은 못 쓰게 된 것 같은데. 버릴까요. "


센조가 아야베의 손에 들린 도구들을 집어 살펴보았다. 그가 도구를 가져가며 스쳐지나간 제 손바닥이 화끈하다.


" 그렇군, 나중에 피규어와 함께 묻어버리거나 하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상자 안에 넣어두자. "

" 네. "


아야베는 도구를 다시 돌려받았다. 그의 말대로, 도구를 도로 상자 안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그리고 제 마음도 똑같이 이불 개듯 접어버린다. 그리고 서랍 한 켠에 집어넣었다. 단단하게 자물쇠를 잠구었다.


" 자, 작업은 이제 끝이고…. 이만 돌아갈까. 키하치로. "


그가 이름을 불렀을 때, 서랍이 꿈틀거렸지만 손으로 잡아 눌렀다. 아야베는 고개를 끄덕이고 촛불을 불었다. 창고의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똑같이 어두워진 바깥에서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달빛에 반짝였다.


" 저녁이네요. 이만 돌아가죠. "


아야베는 먼저 운을 띄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를 붙잡고 따라다니고 있을 테니 선을 긋기로 한다. 후미코를 들고 얼굴 옆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센조가 미소지었다. 달빛이 그를 내리쬐었다. 눈이 부셨다.

다시금 서랍이 꿈틀댄다. 힘을 주어 억눌렀다.


" 그럼, 다음에도 부탁하지. 잘 자라, 키하치로. "


수고했다는 듯 아야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뒤돌아 6학년의 방으로 향하는 타치바나 센조. 아야베는 후미코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듯 박았다. 둔탁한 흙소리가 땅을 튕겨져나와 귀를 메웠다.


" 안녕히… 주무세요. "


닿지 않는 인사를 그에게 건넸다.


아야베는 그 길로 돌아가지 않고, 인술학원의 빈 땅을 찾아 헤맸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을 찾았다. 적막하고, 쓸쓸한 땅에 발을 들이밀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외로운 땅을.


" …. "


아야베는 침묵했다. 후미코를 들고, 땅으로 내리찍었다. 구멍을 팠다. 깊은 구멍을. 계속해서 파내려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땅을 헤집었다. 어느 정도 깊이가 갖추어지자, 모양을 만들었다. 둥글고 넓게 틀을 잡았다. 오늘 뒷산에서 만든 함정처럼 그가 누울 수 있을 만큼 평평하게 함정의 밑바닥을 다졌다.

이곳에 마음의 서랍을 묻어버릴 작정이였다. 아야베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화풀이하듯이 함정을 팠다. 하지만 아야베의 서랍은 마음 깊숙이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구어 둔 자물쇠도 다시 풀리지 않았다.

이제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게 되었다.


아야베는 함정 속에 쭈그려 앉았다.

열쇠가 사라진 자물쇠를 안고,

오지 않는 타치바나 센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는 후미코를 가만히 땅에 놓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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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D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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