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타카마루 X  타이라노 타키야샤마루]


*타이라 가(家) 설정 있음



내리는 비는 그의 눈물을 삼켰다






13살과 15살이 함께 서 있어도 거뜬한 나뭇가지 위. 공기 속은 먼지가 한가득 일고 있다. 둘의 눈빛이 천천히 오고간다.


" ...타카마루 씨. 일단 먼저 내려갈 테니, 천천히 내려오세요. "

" 알았어. 조심해, 타키야샤마루. "


고개를 끄덕인 타키야샤마루는 시선을 저 쪽 들판으로 돌렸다. 귀를 찌르는 함성소리와 말발굽소리,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금속음.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풍경이다. 곧 저 곳으로 들어가 깃발을 빼 와야 한다. 어떤 것으로 하지? 타키야샤마루는 눈을 부릅떴다.


" ..바닥에 떨어진 깃발들이 많네요. 타카마루 씨께 가까이 있는 걸 양보하겠습니다. "


타키야샤마루는 곧바로 발을 굴려 땅으로 착지한다. 안정적인 자세다. 타카마루는 그를 보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에게 대답하듯 조용히 중얼거린다.


" 고마워. "


타카마루는 타키야샤마루가 보고 있던 곳을 겹쳐 보았다. 과연, 가까이에 깃발이 널브러져 있다. 조금 때가 탔지만 방금 전 쓰러진 누군가에게 꼽혀 있던 깃발인 것 같아 보인다. 찜찜하긴 하지만, 타카마루는 타키야샤마루의 위치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아래로 착지했다.

공기는 위에서 보던 것보다 많이 탁했다. 절로 목구멍에 흙이 쌓이는 탓에 콜록거리며 기침이 났다. 타카마루는 입을 가린 채 몸을 낮추고 깃발이 있는 곳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칼과 창이 부딪히고 사람이 베어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심해야 해. 그런 생각에 몸을 더더욱 낮추었다. 닌술학원에서 배웠던 대로, 빠르게 달려나간다. 바람이 볼을 치고 지나갔다. 발에 채이는 자잘한 자갈들이 방해했다. 넘어질 뻔 했지만, 몸을 낮춰. 계속해서, 낮게 나아가면 넘어지지 않는다. 가르침을 기억하며 나아갔다.


" 허억, 헉.. "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이 부근은 시체 몇 구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뒀을 뿐, 조용해져 있었다. 타카마루는 곁눈질로 시체를 흘끔 보았다. 무심코 그 텅 빈 눈과 마주친 느낌이 들어 휙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피웅덩이에서 냄새가 난다. 발을 조금 끌었다. 갈라진 돌들이 발바닥 아래에서 구른다. 식은땀이 났다. 재빨리 깃발을 들고 천 부분만을 떼어 냈다. 돌돌 말아 옷 속 주머니에 넣고 눈을 꼭 감은 채 나무 위로 올라갔다.


" 이거면 된 걸까.. "


품 속에 넣은 깃발을 껴안듯 꾹 옷깃을 여며쥐었다. 아차, 타키야샤마루는 어디에 있지? 타카마루는 구름처럼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전장을 실눈으로 본다. 도저히 사람이 베어갈라지는 것을 맨눈으로 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를 찾아야 해. 아니, 이미 다른 나무 위로 올라가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몸을 돌리다시피 하며 그를 찾는다.


[염탐꾼이다! 잡아!]


한 남자의 커다란 외침이 저 속에서 들려왔다. 타카마루는 그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염탐꾼? 전쟁 중에도 서로에게 염탐꾼을 보내 작전을 지휘하던가? 배운 적이 없는데, 혹시..


" ...아, 큰일.. "


타카마루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타키야샤마루가 말의 뒷발굽에 채일 뻔한 것이 원인이였던지, 그는 깃발을 든 채 커다란 장정 몇 명에게서 쫒겨오고 있었다. 도와줘야 할까? 고민한다.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도와주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일단은 그의 행동을 보고 기다린다. 아직 타키야샤마루의 표정은 진지하고, 당황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나도 계속 여길 다니다 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분명 자신보다 2년이나 어린 사람인데도 존경스러워진다. 닌자라는 건 힘드네.


" 아..! "


열심히 달려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니 괜찮다며 씩 웃어보이는 타키야샤마루. 벌써 장정들과의 격차는 벌어져 있다. 달리기가 빠른걸. 금방 저 속을 빠져나올 것 같아 타카마루는 안심했다. 실습은 완료가 될 예정이였다.


그랬을 텐데.


돌연, 타키야샤마루의 옆에서 말이 쓰러져버린다. 육중한 크기의 말은 옆구리에 창이 깊숙이 박힌 채 거품을 물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멈춰 선 타키야샤마루의 발등에 닿는 말의 갈기가 애처롭게 흔들거리다가, 마지막 울음소리를 내며 숨을 멈춘다. 몇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에, 타키야샤마루의 다리는 얼어버렸다. 고개를 드니 보이는 나무 위의 타카마루.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깃발. 천천히 발을 뒤로 옮겨 말에게서 떨어졌다. 전쟁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아직 양측이 팽팽하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저들에게도 잡히고, 다치게 된다. 타키야샤마루가 다시 내달리려는 순간이였다.

따뜻한 액체가 그의 등 뒤를 덮쳤다. 그 따뜻함은 피부와 옷에 닿자마자 식어버린다. 비릿하고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목 아래가 없는 사람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확, 소름이 끼쳐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져버린다. 머리카락을, 이마를,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뭐지?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땀을 닦듯 손등으로 닦아내 본다. 붉다. 절로 숨을 삼켰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눈 앞의 얼굴이 자신을 보고 비웃었다. 안녕, 피를 뒤집어쓴 비참한 타이라 가문?


타키야샤마루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그대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전쟁터를 빠져나왔다. 타카마루가 나무 아래로 내려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카마루가 그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킨다.


" 타키야샤마루, 괜찮아? 타키야샤마루! "

" 타, 타카마루 씨... "


그의 눈이 흔들린다. 피에 젖은 축축한 옷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타카마루는 안절부절못했다. 축 늘어진 채 충격을 받은 듯한 타키야샤마루의 손은 깃발을 꽉 쥐고 있었다. 손목을 잡으니 힘이 들어가 있다. 이름을 몇 번 더 불러보았지만, 입술만 달싹거린다.


[저기 있다!]


아까 전부터 타키야샤마루를 쫒아오던 장정들이 소리를 질렀다.


" 하필 지금..! "


타카마루는 타키야샤마루를 둘러업었다. 그들이 온다면 타키야샤마루는 물론이고, 자신도 다칠 것이 뻔했다. 냅다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은 발길 가는 곳으로 계속 달려나갔다.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서서, 나무 사이로 달렸다. 커다란 바위가, 얕은 냇물이, 풀숲이 길을 막았지만 여전히 뒤에서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오지 마, 우리는 이 전쟁과 아무 관련도 없어! 타카마루는 이를 악물고 가까이 있는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먼발치서 낮은 목소리들이 울렸다.


[그들을 찾아! 기회가 될 때 죽여버려! 염탐꾼일지도 모른다!]


타키야샤마루를 천천히 동굴 벽을 등지게 앉혔다. 타카마루 자신도 그의 옆에 앉아 기다렸다. 숨을 죽였다. 똑, 똑. 동굴 안쪽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 타카마루 씨, 죄송합니다.. "


타키야샤마루가 조용히 말했다. 타카마루는 그제서야 얼굴에 화색이 돈다.


" 다친 덴 없어? "

" 네. 괜찮아요. 그런데 손이 아직도 떨리네요.. "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도 파르르 떨린다. 똑, 똑. 동굴 안에서 계속 물방울 소리가 난다. 하고 생각했더니 바깥에서 톡, 톡 하고 빗줄기가 조금씩 내려온다. 공기가 차가워진다. 이윽고 시원하게 물줄기가 하늘에서 퍼붓는다. 풀숲을, 냇물을, 바위를 치고 흘러내려가는 빗물이 습기를 머금고 그들을 휘감는다. 이제 전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타카마루는 동굴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다보았다.


" ...아무도 없어. 괜찮아. "

" 다행..이네요. "


타키야사마루는 시무룩했다. 그는 손에 있는 깃발에서 천을 뜯어내 차곡차곡 접었다. 그리고 타카마루가 했던 것처럼 품 속의 주머니로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멈춘다. 피로 흠뻑 젖어있는 옷이 잡혔기 때문이였다. 타키야샤마루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 ...타카마루 씨, 잠시 가지고 있어 주실래요? "

" 응... "


타카마루는 그가 건네주는 깃발 천을 받아 품속에 넣었다. 그가 보기에 타키야샤마루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타카마루는 동굴 밖을 본다. 빗줄기가 힘차게 쏟아져 내려오고 있지만, 구름을 잘 보니 지나가는 소나기다. 그치고 나면 닌술학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타카마루는 말한다.


" 머리를 손질해줄게, 타키야샤마루. "

" ..? 지금요? "

" 저기 있는 바위에 앉아 있어 봐. "


타카마루는 동굴 입구로 걸어가, 자신의 깃발을 꺼내 반의 반으로 두 번 찢었다. 그리고 한 조각을 두 번 접어 빗물에 적셨다. 흠뻑 젖은 천을 꾸욱 짜내, 적당히 촉촉해질 정도로 만들었다. 타키야샤마루는 긴가민가하며 바위로 걸어가 앉았다. 타카마루가 살풋 웃으며 그의 뒤로 가, 머리두건과 머리를 풀어 준다. 긴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덮인다. 굳은 피가 말라붙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차지하고 있다.


" 많이 길었네. "

" 그런가요. "


타카마루의 손이 타키야샤마루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투둑거리며 마른 피의 가루가 동굴바닥으로 떨어진다. 몇 차례 반복하다가 적셔온 천을 들어 머리뿌리부터 머리 끝까지 닦는다. 두피 쪽에 차가운 천이 닿을 때마다 타키야샤마루가 조금씩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타카마루는 정성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천 속으로 스며드는 피. 금방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그것을 타카마루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지고 나와 풀숲으로 던져 버렸다. 머리를 만지다 말고 동굴 입구 쪽으로 나가 뭔가를 하는 타카마루에게, 타키야샤마루가 물었다.


" 끝난 건가요? "

" 아니, 조금 더 할 거야. "


일어나려던 타키야샤마루는 도로 앉았다. 타카마루는 곧잘 가지고 다니던 빗을 꺼내며 다시 타키야샤마루의 뒤로 왔다. 그리고 빗물로 조금 젖은 타키야샤마루의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처음은 뻑뻑했지만 두 번째는 적당했고, 세 번째는 부드러워진다. 타키야샤마루는 눈을 감고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받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타키야샤마루는 처음 보는걸. "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타키야샤마루는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 분명 평소라면 열심히 자기자랑을 하며 타카마루의 머리손질을 받고 있는 자신에 대한 기대감과 머리손질이 완료되었을 때의 자부심을 표출해댔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였다.


" 가문을 욕보이는 일은... "

" 응? "

" 아, 아니. 혼잣말입니다. "


타키야샤마루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잊고 있었던 타이라 가(家)의 무게감이 피에 젖은 옷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타카마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함부로 묻는 것은 미용사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니까. 손님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다.


" 비가 그치면 돌아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

" ...네. "

" 그 때까지는, 계속 머리를 만져 줄 테니까. "

" ... "

" 괜찮아. 너는 해 냈으니까. 잘 했어. "


타카마루의 말투는 조곤조곤했지만, 타키야샤마루의 심장을 찔러댔다. 왈칵, 울음이 올라와 눈가를 비집고 나온다. 감고 있는 눈 앞을 지나가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버린 말. 날카로운 칼에 잘려 날아온 머리. 덱데굴 구르는 눈알. 새빨간 피.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 눈을 좀 더 꾹 감는다.


" 정말 잘 한건가요? "


타키야샤마루는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13살. 아직 전쟁을 맞기에는 이른 나이다. 오늘의 일은 많이 충격이였을 테지. 타카마루는 타키야샤마루의 고개를 잡아 올려주며 말했다.


" 아주 잘 했어. "


타카마루의 품 속은 타키야샤마루의 땀이 벤 깃발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확신하며 말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타키야샤마루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






-Fin

 

'닌타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헤타키]기다림  (0) 2015.09.27
[센아야]함정은 언제나 그곳에  (0) 2015.09.06
[코헤칸]그 열흘의 엇갈림 下  (0) 2015.08.16
[코헤칸]그 열흘의 엇갈림 上  (0) 2015.08.10
[하치라이/쌍닌]옷장  (0) 2015.08.07
Posted by MD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