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야 사부로 x 후와 라이조] [쌍닌]




<한국기반 동양 AU>




수호신(守護神)








1



이제는 나를 잊으라

나의 몸은 바람을 타고

저 높은 하늘을 향했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그대 기억은 땅으로 꺼지고

두꺼운 지렁이가 먹이로 삼았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지상에 남은것은 빈 껍데기 뿐

껍데기 속은 어딘가 날아가버렸다


그러니 나를 잊으라

더 이상 나를 기억말라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원한다






  달이 훌쩍 솟아오른 날 밤. 후와 라이조는 이리저리 뒤척였다. 눈을 감았지만 귓속으로 자꾸만 들어오는, 절절하게 읊는 시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나름대로 양을 세어보기도 했으나, 영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으니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새록새록 옛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의 자신과 어머니.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이 방에서 있었던 작은 일.


  "어머니, 바깥에서 들려오는 저 시는 무엇인가요."


  그는 아직 살아있었던 시절의 어머니에게 물었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그 때는 아직 숨을 쉬고 계셨던 어머니. 그의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어린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저것은 수호신이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의식이란다."

  "수호신?"

  "언젠가 네가 자랐을 때, 또 다른 이름으로 너의 모습을 하고, 너를 찾아오는 너만의 신."

  "어머니는 만나 보셨나요?"

  "아직. 하지만 그 신을 만난다면, 틀림없이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하더구나."


  과연,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었던 다음 날 누군가의 집에서 곡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었다. 향냄새가 온 거리를 진동했지. 향냄새를 들이마시며 어린 날의 그는 수호신의 존재에 전율했었다. 그것이 사람의 죽음을 처음 느꼈던 날이었을까. 하고 라이조는 생각한다. 순수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밤의 골목을 울리는 저 시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살인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 그 살인자의 의식이다. 세간에서는 '얼굴 없는 암살자'라며 전설로 취급하고 있다. 한 번도 그 자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그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는데도,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목소리도 매일 매일 바뀌어서 그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항상 허탕을 치기 십상이었다. 언제나 밤중에 그 자의 시 외는 목소리가 울리면 모두가 문의 걸쇠를 잠갔다. 그렇게 했음에도, 죽을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그 자의 대단함이었다.


  "키리마루. 바깥에 있느냐.“


  바깥에 달빛에 비친 옅고 작은 그림자가 보여, 라이조는 넌지시 물었다. 소년의 대답은 금방 들려왔다.


  "네, 도련님."

  "야참을 먹을 수 있을까."

  "준비해오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이불을 끌어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라이조의 부탁에, 시중을 드는 작은 소년 키리마루는 작은 발을 조용히 딛으며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라이조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살인자. 그 자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몇 분 전에 자택을 나가는 것을 봤는데, 헛간에서 싸늘하게 식은 채 굳은 피를 매달고 있었던 사례도 여럿 있었다.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마지막이었다며 통곡하는 가족들의 원성어린 목소리는 그 자에게 전혀 닿지 않는 것일까?


  "도련님, 야참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문을 열어도 괜찮다."

  "실례하겠습니다."


  사악, 나뭇결이 쓸리는 소리가 나며 미닫이문이 옆으로 열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키리마루는 소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반 위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있는 작은 사기 주전자와 간단한 다과가 가지런하게 올려진 접시가 차지하고 있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소반을 놓은 키리마루는 주전자를 손가락으로 감싸 안고 잔에 차를 담았다.


  "시 읊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구나."

  "'얼굴 없는 암살자'가 기승인가 봐요."

  "향을 준비해둬야겠어. 우리 집안에서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야."

  "…. 물론이죠."


  키리마루는 잔을 라이조가 있는 쪽으로 밀어 주었다. 라이조는 눈을 내리깔며 잔을 왼쪽 손으로 잡는다. 따뜻한 온도가 손바닥을 덮었다. 입술에 잔을 대고 적당한 온도의 차를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어보냈다. 가슴 안쪽을 타고들어가는 차의 물길이 느껴진다. 씁쓸한 맛이 혀에 감돌아 달짝지근한 다과를 하나 집어넣으니 마음이 진정된다.


  "소반은 조식(朝食)때 치워도 괜찮으니, 이만 가 봐."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키리마루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뒤로 물러나 문을 닫았다. 그는 이곳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행동도 곱고 시킨 일을 무르는 일이 없어 라이조의 마음에 썩 들었던 아이였었으니 되도록이면 지키고 싶었다. 몇 년 전부터 죽어나갔던, 자신의 시중을 들던 하인들의 이름 중에 그 어린 아이의 이름까지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시를 읊는 소리가 이제는 아련하게 들린다. 주체가 제법 멀리까지 나간 것 같았다. 이 이상 살인자에 대해, 오늘 밤 생길 피해자에 대해 생각하다가는 머리가 더 어지러워질 것 같아 관두었다. 조금 더 잠이 올만한 주제를 생각하다가, 라이조는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검토해보기로 하고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는 대부호의 맏아들이었다. 맏아들이라고는 하나, 정실이 아닌 소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정실은 연달아 아이를 셋 낳았지만, 모두 여자아이로 태어나 버렸고, 여자아이는 대를 잇지 못한다는 할아버지의 구시대적인 고집으로 인해 지금은 시집을 가서 집을 떠난 지 오래다.    라이조는 자신이 태어난 경위를 되짚어보았다.

  라이조의 어머니, 소실은 몸이 약했었다. 그 약한 몸을 이끌고 겨우내 낳은 것이 아들이었을 때는, 집안의 온갖 경사가 다 터진 듯이 모두가 축하했다고 전해 들었었다. 정실조차도 눈물을 흘리며 소실을 껴안았었다고 한다. 라이조는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좋은 옷부터 시작해서 부족함 없는 먹을 것들, 거대한 저택, 끊임없는 배울거리들과 자신에게로 넘어올 예정인 부유한 재산. 남부럽지 않았다.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겸손을 잊지 말라 하셨다. 라이조는 똘똘한 아이였고,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아이가 바른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일이였다. 아버지의 뒤를 쫓으며 서책을 들고 글을 읊던 자신의 어린날을 회상하며 라이조는 잠에 빠져들었다.


  기억 저편에서 크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이른 아침이었다. 저택 내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비명소리가 난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뒤이어 절망적인 외침이 여러 번 울린다. 주인님, 주인님! 안 돼, 이럴 수가…. 어린 라이조는 뒤늦게 짧은 다리를 움직여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다들, 무슨 일입니까? 커다란 장정들에게 시야가 막혀 기웃거리고 있으니, 작은 어머니가 큰 손으로 눈을 가리며 그를 안아들었다. 도련님. 보시면 안 됩니다.


  [아니, 너는 봐야 한단다.]


  보면 안 됩니다, 도련님. 얼른 방으로 돌아가세요.


  [죽은 네 아비의 얼굴을 똑바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라이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작은어머니의 손이 서서히 멀어진다. 라이조는 그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지만, 흘러가는 물을 잡은 것처럼 그대로 빠져나가버린다. 작은 어머니, 가지 마세요.


  [자, 얼른.]


  당신은 누구야? 뭘 보라는 건가요?


  [저 피투성이 몸뚱아리를 봐….]


  시야가 흐려진다. 하인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들의 중심에 앉아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줄줄 피를 흘리며 기괴하게 목을 비트는 아버지. 하인들은 일제히 라이조를 쳐다보았다. 도련님. 주인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라이조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푸하하! 하고 누군가가 호탕하게 웃었다. 라이조는 시선을 위로 올린다. 가지런히 얹어진 기와지붕에 가볍게 올라앉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라이조에게 손가락질한다.


  [네 아비는 죽었어. 내 손에 거꾸러져 생을 마감했지. 불쌍한 것.]


  라이조는 숨을 헐떡였다. 왜? 왜 아버지를 죽였나요? 도대체 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웃어댔다. 숨이 넘어가 죽을 정도로 웃어댔다. 그의 웃음이 귓가에 울리면 울릴수록 라이조는 숨이 막혀왔다. 목을 옥죄어오는 웃음소리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쁘다. 라이조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네가 그러고도 무사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살인자! 이 살인자야! 당신은 살인자라고! 악을 썼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하인들이 하나 둘 씩,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모두가 사라지고 피투성이 아버지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만이 남았다. 지붕 위에서 그가 웃음을 뚝 멈췄다.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진다.


  [현실을 봐. 도련님.]


  그가 깃털이 내려앉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천천히 걸어와 라이조의 멱살을 잡고 얼굴 가까이 잡아당긴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도, 코도, 입도. 눈으로 분간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도 보이지 않아 라이조는 소름이 돋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입에서 냉기가 뿜어져나왔다.


  [누가 죽였을까?]


  확, 라이조는 그를 거세게 밀쳐냈다. 눈을 부릅뜨고 앞에 있는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죽어 있는 방이 아니다. 여기는 라이조, 자신의 방이였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땀이…."


  작은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라이조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미안하게도 일어나자마자 밀어내버린 것은 작은어머니의 몸이었던 듯싶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악몽을 꾼 걸까. 라이조는 이불을 들추어내며 고개를 선선히 저었다.


  "괜찮아요, 좋지 않은 꿈을 꾼 것뿐입니다. 미안해요, 작은어머니."


  작은어머니의 손을 맞잡고 안심시켜드린다. 과거의 회상이었던 꿈이, 언제부터 악몽으로 변질되어버린 걸까.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게 하다니. 작은어머니가 마른 천으로 라이조의 이마를 닦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의 혼례가 멀지 않았는데, 악몽이라니. 좋지 않네요."


  작은어머니는 정성스럽게 라이조의 몸을 닦아주며 고민한다. 이렇게 땀이 많이 나시면 상대 아가씨께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곧 물을 준비해 올 테니 씻으셔야겠어요. 머리는 이게 뭔가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더 하네요! 온 방향으로 뻗어서 나뭇가지 같아요. 자, 얼른 세수부터 하시고…. 속사포로 터져 나오는 그녀의 잔소리가 익숙하다. 작은어머니. 사실 그녀는 아버지의 동생의 아내거나, 또 다른 서모(庶母)가 아니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그를 정성껏 돌봐준 또 다른 어머니이기에 부르는 호칭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녀에게서 애지중지 키워진 라이조는 그녀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꼈다.


  "도련님, 그 악몽 저에게 파세요."

  "네?"


  그녀 또한 라이조에게 지극한 모성애를 보이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꿈은 함부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간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에게 어떤 영향이 갈 지 모르기 때문에 라이조는 재미있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그 행위를 피했다. 그런 그에게 작은어머니가 손을 꼭 붙잡고 악몽을 팔라고 말한 것이다.


  "무슨 말이세요, 작은어머니."

  "도련님의 혼례는 경사스러운 일이니까요.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작은어머니는 라이조의 손을 더욱 거세게 붙잡았다. 결심에 찬 눈으로 똑바로 라이조를 바라본다. 라이조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앞에 두고 고개를 차마 돌릴 수가 없었다.


  "도련님 대신 죽을 각오로 악운을 받을 겁니다."

  "…."


  작은어머니의 고집은 잘 알고 있었다. 라이조는 고민한다. 이대로 가다간 조식은커녕 내일 치룰 혼례를 제 때 계획할 수도 없게 될 거다. 작은어머니는 계속해서 나가려는 자신을 막아대며 꿈을 판다고 말하기 전에는 아무 곳도 갈 수 없다고 윽박지를 테고…. 라이조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작은어머니의 손을 잡아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저 대신 죽는 건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요."


  벌써 주름이 진 그녀의 손등이 안쓰러워 조금 더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자글자글함. 예전에는 조금 더 젊으시고, 자신의 눈에 그렇게 아름다웠으며, 또한 존경스러웠는데.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바깥에서 키리마루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련님! 조식 들어가요!"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도련님."


  작은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면, 바깥으로 나가는 작은어머니와, 어젯밤처럼, 하지만 어젯밤보다는 조금 더 큰 상을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오는 키리마루. 혹시나 아이가 넘어질까 싶어 라이조는 상을 슬쩍 손으로 받쳐준 뒤 가까이 끌어왔다. 조금 흔들거렸지만 무사히 도착한 조반. 상 위에 푸짐한 반찬들이 색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접시에 담겨 있다. 악몽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았다. 적당히 먹고 마무리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크흠, 흠흠."


  갑자기 키리마루가 헛기침을 한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키리마루를 바라보는 라이조. 키리마루가 라이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곤, 반찬 하나를 손가락질하고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독초의 즙을 넣는 걸 봤어요."

  "…. 항상 고맙구나. 키리마루."


  익숙한 일이였다. 재산에 탐을 내는 친척들이 보낸 하인들은 종종 그에게 이런 식으로 도전을 보내왔다. 그들의 주인에게 한 몫 단단히 챙겨 보이겠다고 맹세하고 왔겠지. 그럴 때면 라이조는 키리마루에게 시켜 그들에게 돈을 두둑하게 챙겨 주었다. 그러면 한동안은 자객도, 도둑도 들지 않았다. 충성심도 돈으로는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벌써 그 돈의 효과가 떨어졌나 보다. 라이조는 가까이 있는 서랍에서 짤랑거리는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키리마루에게 쥐여 주었다.


  "반절은 네 것으로 하렴."

  "언제나 감사합니다, 도련님."


  키리마루는 잽싸게 주머니를 들고 사라졌다. 참 건강한 아이라니까. 귀에 걸린 웃음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뛰어가 버리는 소년이 귀엽다. 어른들도 저 아이처럼 모든 생각을 얼굴로 비추어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천천히 젓가락을 짤깍이며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밥을 휘저었다. 여유롭게 감상이나 나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라이조는 꾸역꾸역 입 안에 밥과 반찬을 몇 차례 집어넣고, 반찬그릇의 반찬을 조금 남긴 채, 젓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면 바빠질 테니 얼른 준비해야겠지.


  "얼굴도 모르는 아가씨와 결혼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온전히 재산을 가지게 되는 것은, 혼례를 치룬 이후부터'

  조금 설레는 기분에 라이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혼례라. 어떤 느낌일까. 바로 첫날밤을 지내야 하겠지? 잘 할 수 있을까. 방 청소는 제대로 끝냈을까. 무엇보다도 혼례를 치르고 나면 드디어 이 저택의 주인이 된다. 친척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일이 일상이 된 지금, 얼른 그 일상을 깨부수고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시집오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키는 어느 정도 되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조차 몰랐지만, 그녀와 아이가 생겨서 좋은 가정을 꾸리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내에게 잘 해주어야지. 아이가 생기면 더 잘 해주어야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삼일 밤낮을 울적하게 지내셨다. 병든 어머니에게 온갖 약재와 의원들을 들여보냈지만 결국 떠나버렸으니, 어린 날의 라이조를 끌어안고 아버지는 흐느껴 우셨다. 나도 그렇게 아내를 사랑해 주어야지.

  일단은 작은어머니가 말한 대로 머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라이조는 거울을 꺼내들고 제 얼굴을 살펴본다.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잘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이 가득 거울을 채웠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가며 보다가,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렸다. 부스스하다. 악몽에 많이 뒤척였던지 잔뜩 꼬여 있었다. 거울을 내려놓고 머리를 다시 묶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오늘의 꿈 속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마당을 울린다. 덜컥 놀라버려 라이조는 거울을 손에서 놓쳐버렸다. 바닥에 닿은 거울이 섬뜩한 소리를 귓가에 찔러 넣으며 산산조각난다. 다급한 발소리가 라이조의 방을 향했다. 라이조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신나게 자리를 떴던 키리마루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울상을 지으며 라이조를 쳐다보았다. 터진다. 눈물방울이, 아이의 눈물이 터져 흘렀다.


  "…무슨 일이냐, 키리마루."

  "그, 그게… 그게… 도련님…. 흑,"


  키리마루가 눈물을 글썽인다. 소년은 딸꾹질을 하며 소매로 입술을 가린다. 라이조는 깨진 거울을 허망하게 쳐다보다가, 키리마루를 본다.


  "왜 그러지?"

  "도련님의… 작은어머님이…"


  머리끝부터 찬물을 끼얹는 듯한 예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방금 전 작은어머니와 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악몽. 그럴 리가. 괴랄하게 몸을 비틀며 자신을 바라보았던 아버지의 시체가 생각난다. 아니야.

  라이조는 멍하게 흐려진 눈으로 키리마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말이 너의 뒷말이 아니길. 제대로 말 해 보렴. 키리마루. 어서.

  눈빛으로 재촉한다. 키리마루는 코를 훌쩍이다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피, 피투성이…가…,"


  목 놓아 울어버린 어린 아이의 절규는, 라이조의 심장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







2


우는 사람은 없었다. 짙은 향냄새만이 저택을 가득 채웠다. 라이조는 가만히 두 손을 맞잡고, 자신의 작은 어머니를 배웅했다. 하늘로 보내드렸다. 계획되어 있었던 혼례는 취소되었고, 오늘의 희생자는 하늘로 올라가는 향의 연기에 덧칠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하는 그 의미 없는 시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저는 당신을 잊을 수 없는데, 그 자는 잊으라 하는군요.


" 키리마루. "

" 네. "

" 향을 준비해두길 잘 했구나. "

" …. "


  도령은 어젯밤 야참을 먹으며 키리마루와 했던 대화를 회상한다.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한 마디가 이렇게 실현되어버릴 줄이야. 라이조는 아직 자신의 입안에 감돌고 있는 그 말을 계속 곱씹었다. 마치 그것에 힘이 실려 버려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 같이. 착잡함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야.]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고, 상상하기도 싫었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라이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인자. 살인자. 자신의 꿈속에 나왔던 그 얼굴 없는 살인마. 어젯밤 계속해서 시를 읊으며 골목을 누볐던 그 살인마. 아버지를 죽인 그 자가 이번에는 자신의 작은 어머니를 죽였다. 속이 끓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몇 시간 전, 키리마루의 울음 섞인 보고를 듣자마자 보러 갔던 작은 어머니의 상태는 참혹했었다. 배가 뒤틀린 채 칼로 쑤셔 넣은 듯한 상처. 허공을 보고 멍하게 굳어버린 눈. 핏기가 빠져가는 피부. 마치 그날 아침 꿈속에서 보았던 아버지와 같이, 그의 작은 어머니는 고개를 뒤틀며 금방이라도 자신을 바라볼 것만 같았다.


  "도련님. 들어가셔야 합니다."


  라이조는 재촉하는 하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어머니는 자신을 키워 준, 진짜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좀 더 파고들어가 본다면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와 같은 하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저 라이조 자신이 예우를 갖추어 대했기에 다른 하인들도 덩달아 예를 갖추었던 것 뿐. 그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인지 향은 금방 꺼졌다. 하인들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였다. 어렴풋하게 그들 속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하필이면 그 년이 죽어서….


  "거기, 조용히 하거라." 


  라이조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가 말했는지는 몰랐으나, 그들 무리를 쏘아보았다. 싸늘한 분위기에 하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키리마루가 당황하며 무리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라이조의 바짓가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가요, 도련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랑 같이 들어가요. 아이의 눈이 간절히 그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이 아이도 작은 어머니와 친했었지. 그래, 들어가자. 이 이상 하인들에게 화를 내어 무엇하겠나.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고, 빈 자리는 재깍 채워 넣어야 할 텐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방에 도착했다. 하인들은 모두 마당에 모여 작은어머니의 흔적을 정리하고 있었다. 존재 했었던, 이제는 없는 사람과 관련된 것을 향해 '정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상당히 소름 돋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마치 더러운 물건을 치우듯이 말이다. 라이조는 방 안으로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을 보니 아침에 깨뜨려버린 거울조각이 흩뿌려져 있었다. 곧장 키리마루가 들어와 비로 조각을 비로 쓸어 담았다. 잘그락거리는 거울 소리가 섬뜩하다.


  "많이 슬프시고,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조심하세요. 도련님."

  "…?"

  "이제 도련님의 방패는 사라졌어요."


  의미심장한 말을 한 뒤, 키리마루는 부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라이조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거울조각을 마저 담는다. 그 행동에 몸이 섬짓 떨린다. 혼례가 취소되어 내 가족이 될 사람도 없어졌고,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차례대로 하늘로 떠났다. 이제 이 집안에 남은 것은….

  혼자다.


  "앞으로는 도와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키리마루의 그 한마디에 라이조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 암살….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느껴왔었던 그 기분이 이제서야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다. 라이조, 그가 죽는다면, 모든 것은 피도 섞이지 않은 그의 친척들 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과,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저택과, 작은어머니와 함께 자랐던 방이 모두. 전부 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라이조는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었지만. 심지어 오늘은 작은어머니의 죽음까지 직접 봤지만. 체감하기 어려웠다. 그저 귀신을 본 듯 소름 돋는 분위기만이 몸을 타고 돌았다.

  키리마루는 거울조각을 담은 자루를 들고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말없이 문 바깥으로 나가, 천천히 문을 닫기 시작했다. 라이조는 가만히 키리마루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틈, 사람의 손가락 한 마디가 들어갈 만한 아주 작은 틈에서, 문은 멈추었다. 그리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되도록이면 도련님과 함께, 남아있겠습니다."


  탁. 소곤거림을 끝으로 문이 닫힌다.

  라이조는 채 정리되지 않은 이불을 잡고 꽉 쥐었다. 복받쳐 오르는 이상한 감정에 드디어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이것으로 조금 안심이다. 키리마루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죽는 자신에게 흙을 덮어줄 아이가 되겠지. 막지는 못할지언정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줄 사람이 될 것이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물을 억눌렀다. 조그마한 아이에게까지 동정 받는 상황이 된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디 불쌍하고, 그러면서도 아이의 말에 벅차오르는 기쁨과 안심을 느끼는 저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이불에 얼굴을 박고 계속해서 속을 움켜쥐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붓는다면 하인들이 또 우습게 보겠지. 그러니까, 울면 안 된다.




3


  갑자기 어릴 적 생각이 난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의 기억. 라이조는 벽에 등을 대어 앉은 채 눈을 감고 생각에 집중했다. 정말 어렸을 적에,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해 주셨던 말.


  [삶의 지표가 되는 기억이나 추억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는 것이 좋지.]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너는 아직 어리니 어쩔 수 없지만, 곧 생길 거란다.]

  [어떤 게 말인가요?]

  [생각하면 할수록 목표가 되고, 의미가 되는 것이지.]

  [삶이라는 것에서 말입니까?]

  [그럼.]


  아침부터 무의식적으로 되뇌고 있었던 살인자의 시는 머릿속을 점점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이제는 나를 잊으라…. 라이조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생각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지만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야말로,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걸 생각하는 거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들을.


  "목표. 삶의 목표…. 그래, 의미."


  되새기기 위해 중얼거렸다.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되는 지표. 예전엔 많이 생각해 봤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얗다. 다시 생각해내야만 했다. 분명히 몇 년 전에는 그런 물건이라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아침에 깨뜨려버린 어머니가 쓰시던 거울? 아니야. 어머니는 거울을 보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지금은 어머니의 손때조차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 방 자체? 물론 추억이 가득하고 생각이 절로 깊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이 장소가 살아가는 목표와 의미가 되지는 않았다. 이 집? 물론 아버지가 남겨준 것이고 지켜야 마땅할 것이지만 그리 애착이 깊은 집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뭐가?


  "사람도 되는 건가…."


  기억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한 장면. 부서진 흙벽 위에 올라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던 옛 친구가 스쳐지나갔다. 갑자기 멍해진다. 라이조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바깥도 조용하고, 공기도 조용하다. 숨소리만 방을 가득 채웠다. 그 아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생김새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따뜻했고 자신을 항상 지켜줄 것만 같은 아이였다. 마치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수호신과 같은 따스함에, 그는 그 아이를 알게 모르게 좋아했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웃는 모습.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흔들 움직이며 콧노래를 부르던 아이. 흙벽 아래로 폴짝 뛰어내리며 손을 내밀어주었던 아이.

  아버지께 크게 혼난 뒤로 사적인 외출을 금지당하고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라이조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을 느낀다. 언젠가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소원하고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평민인지 양반인지, 혹시나 노비일지도 모를 그 아이를.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잠시 동안 음미하다가, 사람을 불렀다.


  "바깥에 있느냐."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모두 정리로 바쁜 걸까. 간단한 약과라도 먹고 싶었으나, 이른 저녁은 간단하게 먹었으니 라이조는 상관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뺐다. 문을 보던 시선을 돌려 창을 보니 달이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곧 어두워지겠지, 오늘은 일찍 자 둘까. 속에서 밀려올라오는 하품을 한다. 피곤해. 참으로 피곤한 날이다. 달빛이 은은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편히 주무십시오. 작은어머니."


  달을 보며 라이조는 눈을 감았다.






4


이제는 나를 잊으라

나의 몸은 바람을 타고

저 높은 하늘을 향했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그대 기억은 땅으로 꺼지고

두꺼운 지렁이가 먹이로 삼았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지상에 남은것은 빈 껍데기 뿐

껍데기 속은 어딘가 날아가버렸다


그러니 나를 잊으라

더 이상 나를 기억말라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원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이조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시 소리를 꿈결에 흘려보낸다. 살인자. 살인자. 또 사람을 죽일 셈인가?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다가 포기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하지만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 내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라. 이미 당신은 나의 사람들을 많이 죽였지 않은가. 살려 다오. 제발. 이제 나에게는,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의 수호신이여, 저것을 벌하지 않으시려거든 나를 수호하시어 죽여  주십시오. 혼자서 살아가고 싶지만,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외롭습니다. 지금 나의 곁은 작은 아이 하나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저를 가까이 돌봐 주십시오. 당신의 가까이. 가까이에서 돌봐 주십시오….

  기도하며, 라이조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5


  깨워줄 사람 없는 첫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악몽을 꾸어도 걱정해줄 사람 또한 없다. 조용하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뜨기는 싫었다. 라이조는 계속 자리에서 누워 버텼다. 덮고 있는 이불이 따뜻해 맨살을 살짝 비볐다. 부드러운 비단결이 느껴졌다. 일어나기 싫다. 하지만 오늘은 할 일이 많아. 최근 읽지 않았던 글도 마저 읽고, 혹시 아픈 일꾼들이라도 있는지 점검하고, 남은 재산의 관리를 한 뒤…. 다시 혼례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퍼뜩 눈이 뜨인다. 그래, 얼른 혼례를 끝내면 나는 그들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 자식이라도 생긴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나를 죽여도 재산은 내 자녀들에게 갈 테니 말이야. 라이조는 곰곰이 생각한다. 되도록이면 빨리 날을 정해야 해. 작은어머니가 자신의 꿈까지 사들여가며 지키려고 했던 혼례다. 성공해내야만 했다. 라이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갖춰 입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키의 그림자가 문에 비친다.


  "키리마루인가."

  "네, 도련님. 조식을…."

  "아니, 먼저 외출부터 하겠다. 씻을 물을 준비해 다오."


  키리마루는 가져온 소반을 옆에 치워 둔 채 황급히 세숫물을 뜨러 갔다. 옷을 갈아입고, 문 바깥으로 나오니 의외로 조식이 꽤 먹음직스럽게 보여, 약간은 후회했다. 그래도 정한 것은 확실하게, 재빨리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깔끔하게 몸을 씻고 갓을 갖춰 쓴다. 혼례를 치르기로 했던 집안에 직접 찾아가보기로 이미 결심했다. 최대한 날을 빨리 잡고, 혼례는 간소화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대신 예물을 넉넉하게 보내야겠지. 신부의 부모도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다. 굳게 믿고 저택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빨리, 빨리. 그들에게 가서 말을 전해야 해. 그렇게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


  "향냄새가 나네요. 이번엔 또 누가…."


  키리마루가 종종걸음으로 라이조를 뒤따라오며 코를 킁킁댔다. 라이조도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옅었지만, 분명히 향냄새다. 그렇구나. 어제의 그 시 읊는 소리는 꿈이 아니었구나. 라이조는 모래알이 눈알을 후벼 파고 들어온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름 모를 그 분에게도 명복을 빕니다. 마음속으로 예를 차렸다. 안타까운 사람이여.

  그렇게 그 대화는 종결일 줄 알았건만.


  "신부가… 죽었다는 겁니까?"


  라이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노부부는 몇 번이고 문질러서 새빨갛게 부어버린 눈을 끔뻑이며 라이조를 보았다.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그들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라이조는 서로 끌어안고 다시 흐느껴 우는 노부부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엔 키리마루가 말없이 라이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의 손은 눈물을 참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키리마루."

  "네."

  "…오늘은 할 일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러겠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키리마루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곧 소문이 퍼질 것이다. 혼례를 치룰 상대가 오늘 죽어 버렸다나봐. 저런, 딱하기도 하지. 라이조는 구겨지는 인중을 꾹 누르며 서재로 들어갔다. 종이와 나무 냄새가 확 풍긴다.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근 주일간 들어오질 않았더니 조금만 있어도 이 모양이군. 이곳을 청소하던 담당은 누구로 할지 하인의 얼굴을 한명씩 생각해보다가, 도저히 진행되지 않아 관두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며칠 전 읽다 만 서책을 꺼내들어 자리에 앉아 핀다.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검은 먹과 누리끼리한 종이의 경계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허망하게 보냈다. 머릿속에 글자가 들어오질 않는다. 라이조는 책을 잡아 던져버리려다가 관두었다. 애꿏은 책에 화를 내서 어쩌겠다는 건가. 얌전히 제 자리에 책을 꽃아 넣고 서재를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아 당장 누가 시비를 건다면 곧바로 주먹이라도 나가버릴 것 같았다. 라이조를 발견하고 멀리서 키리마루가 총총 달려온다.


  "방금 중식을 놓고 오는 길입니다, 편하게 드세요. 도련님."


  미소 지으며 웃는 아이의 얼굴에 대고 라이조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조금 


  "이번에는 얼마를 받았느냐?"


  키리마루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핏기가 싹 가셨다. 정곡을 찔린 거다. 키리마루는 침을 꼴깍 삼키며 손바닥을 조심조심 펴 보인다. 다섯 개. 이번엔 많이 받았구나. 딱하기도 하지. 입 가에 경련이 이는 미소를 그에게 지어보였던 아이가 안쓰러웠다. 라이조는 한숨을 쉬며 키리마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세 배를 줄 테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라."


  라이조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키리마루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라이조를 바라본다. 입술을 꽉 깨물다가, 중얼거리듯이 그에게 말했다.


  "아니, 계속 제가 할 겁니다."


키리마루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대로 하렴. 라이조는 조용히 대답한다. 키리마루는 울 것 같아 보였다. 라이조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쓰다듬어 준 뒤 방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몇 걸음 걷고 나서, 키리마루가 모래 끄는 소리를 내며 곧바로 따라와 라이조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긴다.


  "도라지는, 드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이 간절하게 라이조를 바라보았다. 라이조는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라이조의 옷자락을 놓은 키리마루는 걸어가는 라이조의 뒤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허름한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소맷자락으로 스며드는 아이의 눈물이 진하게 자국을 남긴다.




6


  수저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깨작깨작 울렸다. 라이조는 밥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씹었다. 입 속에서 단맛이 느껴질 때까지 씹어댔다. 죽과 미음처럼 묽어질 때까지 뭉갠 뒤 삼켰다. 차마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을 수가 없었다. 키리마루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괜스레 불안하다. 밥을 먹다가 졸도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두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해본다.

  젓가락을 들어 오른손에 잡았다. 몇 번 허공을 집어 보다가, 왼손으로 고쳐 잡았다. 젓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조심스럽게 도라지가 담긴 접시를 향해 그 끝자락을 입으로 베어 문 것처럼 잘라냈다. 다시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옮겨 잡는다. 잘라낸 부분은 접시 아래로 숨겼다. 이것으로 독을 넣은 하인은 불안해하겠지. 그 자가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먹은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며, 설거지를 한다면 자신이 일부러 도라지 끝을 잘라 접시 아래에 두었다는 걸 알아챌 테니 말이다.


  "거두어 가거라."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림자에게 말했다. 하인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상을 들고 나갔다. 키리마루가 아니었다.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데…. 새로 들어온 자인가. 라이조는 딱히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것 같지만 얼굴을 돌리지 않는 라이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문을 도로 닫는다. 딱딱한 문을 닫는 소리가 탁 하고 울렸다. 곧 바깥은 어두워질 것이다.

  어젯밤처럼 달빛이 방바닥 아래로 비추어질까. 라이조는 조금 기대했다. 오늘도 자기 전 하늘로 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약간 슬퍼진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많이 끼어 있다. 저 구름의 무리가 지나간다면 달은 금방 밝아지겠지. 손을 모아 기도했다. 먼저 간 그들이 편하게 올라갔길.


  "어머니…."


  손을 맞잡고 꾹 눈을 감고 있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라이조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본다. 누가 듣진 않았겠지? 재빨리 문 바깥을 살펴보니 그림자는 없다. 하인은 방 앞을 이미 떠났다. 다행이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휴. 한숨을 쉬고 손부채질을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동안에 바깥이 더 어두워진 것 같다. 곧 방 안도 어두워지겠지. 라이조는 드리워지는 그늘 속에서 가만히 숨을 들이쉰다. 이불을 들었지만 잠에 빠지기가 어렵다. 또 악몽을 꿀 것 같아서 싫었다. 악몽이 싫은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고 나서 깨워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싫어졌다.


  "후."


  응어리를 풀어내듯 숨을 내쉬었지만 영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잠이 오기 전 한동안 앉아있을 생각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편다. 손을 편안하게 내리고 바닥을 살짝 쓸었다. 사악, 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나 곧바로 손을 들어 살펴본다. 손끝에 매달린 붉은 피가 한 일 자로 새어나오고 있다. 베인 건가?


  "…."


  손을 내렸던 곳을 더듬거려 본다. 뭔가가 잡혔다. 차갑고 딱딱하고 납작한…. 채 치우지 못한, 가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거울조각이다. 이렇게 커다랗게 떨어져나갔는데 어떻게 볼 수 없었을까. 아니, 자세히 보지 않아서 치우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주의력이 부족하군. 하지만 그 때는 키리마루 나름대로도 좋지 않은 기분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그를 위로했다. 라이조는 그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큰 조각이라고는 했지만 역시 떨어져나온 조각이다. 정말 작다. 작은 그 공간에 얼굴이 가득 채워져 테두리 바깥으로 빠져나가선, 동그란 자신의 눈만 보인다. 자신의 눈알을 정면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좋은 기분이 아닐 텐데도 라이조는 한참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다가, 베였던 손가락이 점점 따가워져 입으로 물어 핥아냈다. 찝찝한 피 맛이 혀를 감아 돌았다.


  "…. 어머니가 항상, 닦아 주셨는데."


  눈을 살짝 감는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것도 어머니가 쓰셨던 거울이다. 거울을 싫어하셨지만, 그래도 몇 번은 이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겠지. 어머니께서도 저처럼 이렇게 거울을 보셨습니까? 라이조는 두 손으로 거울조각을 잡고 어머니를 안듯 품에 안아 본다.


  "어머니."


  아버지가 처음 어머니가 오셨을 때 선물해주셨던 물건이라 하셨다. 보기 싫었어도 분명 애지중지하셨겠지. 깨뜨리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는데. 라이조에게 막심한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리 어머니의 흔적이 별로 없는 물건이라지만 그 감정은 분명 남아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았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더 아쉬워진다.


  "아버지…."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는 거울조각은 여전히 차갑다. 라이조는 품에 안아보았던 거울을 다시 꽉 쥐고 자신의 눈을 비춘다. 흔들리는 검은 눈알이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순간, 소름이 돋아 그대로 거울조각을 홱 던져버린다. 팔뚝이 아려 올 정도로 거세게 던져버렸다. 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이미 그 감정을 주고받을 사람들조차 사라져버렸는데, 감정을 잡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젠장, 젠장…."


  깨달았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 물건에 의지하는 짓조차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이 집의 가주이면서도, 가장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되새긴다. 지켜줄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한다. 어머니가 항상 기도하셨던 그 수호신은 언제나 생명을 거두어가기만 하지. 이름대로 수호는 언제 할 생각인 건지 의문이다. 마침 바깥에서도 그 지겨운 살인자의 시가 울리고 있다. 이제는 나를 잊으라. 이제는 나를 잊으라. 수호신은 저 자를 거둬 갈 생각은 없는 것인가? 저 자의 시처럼 그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저 살인자를 하늘로 데려갈 생각은 없는 것이냐는 말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틀렸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것과 달리 그는 저를 돌보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저 살인자를 데려갈 생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곁에 존재하신다면, 수호신이여. 내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맞잡은 손에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댔다.


  "흑…."


  라이조는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손가락의 피와 함께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작은어머니. 저는 형체도 모르고 존재도 알 수 없는 수호신보다, 당신들이 더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을 존재가 아무도 없습니다. 수호신이 아니라면 저는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수호신이여. 그곳에 있다면, 계신다면…. 아직은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아니, 수호신이여. 평생 믿겠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을 받들고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7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추슬렀던 라이조는 감았던 눈을 떴다. 정리된 벅찬 감정도 잠시. 어두운 밤. 갑자기 서늘해진 기분. 익숙하지 않은 인기척이 등줄기를 쓸고 지나갔다. 팔에 소름이 돋는다. 바깥의 구름이 걷혀졌던지, 달빛이 창문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대비되어 달빛이 없는 방 안은 완전히 새까맣다. 살인자의 시 읊는 소리가 그쳤다. 언제 그쳤는지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스르륵 사라졌다. 자신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하다. 촛불 한 줄기도 없는 어둠 속에서 어떤 형체가 움직였다. 짐승? 몰래 들어온 하인? 라이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모았던 손을 천천히 풀고, 혹시라도 암살자라면 도망칠 준비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죽는 것도 가장 편한 길이 아닐까. 머뭇거린다.

  천천히 그 형체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거리는 맨발의 조용한 소리가 라이조의 숨소리와 섞였다. 이내 형체는 창문 가까이서 멈춘다. 라이조는 입술을 달싹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인이라면 당장 바깥으로 나가고, 암살자라면 속히 수행하라!"


  악을 쓰는 듯한 그의 말에, 형체는 얼굴만을 그늘에 가려 둔 채 고개를 갸웃했다. 어렴풋이 보일 것 같기도 한 얼굴이 아직은 어둡다. 라이조는 실눈을 떴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 천천히 형체가 창문을 넘어서고, 달빛이 천천히 그의 몸을 비추었다. 시선을 올려다 본 라이조의 눈 끝에 서 있는 것은,


  방금 전 거울로 보았던, 자신의 얼굴과 똑 닮은 사내다.






8


  "당신은…."


  [언젠가 네가 자랐을 때, 또 다른 이름으로 너의 모습을 하고, 너를 찾아오는 너만의 신.]


  어머니의 말씀이 스쳐지나간다. 라이조는 벙 찐 얼굴로 한참 사내를 쳐다보다가, 왈칵, 채 그치지 못했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욱욱거리는 목소리가 경박하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자신의 얼굴이다. 자신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말했던 것이 이런 것인가요? 나의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오는 나만의 신이라는 것입니까? 저는 이제 진심으로 수호신이란 것을 믿고 따라도 되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옛 음성이 또렷하게 머릿속에서 울렸다. 틀림없이 좋은 일만 일어날 거란다. 그 신은 그런 존재거든.

  라이조는 일어날 생각도 않고, 무릎으로 천천히 걸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사내의 손을 공손히 잡았다.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라이조는 주문이라도 읊듯이 사내에게 말했다.


  "나의…. 나의 수호신이시여."


  사내의 손바닥을 자신을 향하게 펴고, 그의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믿지 않으려 해서 죄송합니다. 항상, 항상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 번 더, 입을 맞춘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당신을 욕하지 않겠습니다."


  두 손을 더 꽉 쥐고, 사내의 손을 라이조 자신의 손 안에 가두었다.


  "나, 후와 라이조의 마음을 수호신께 바칩니다."


  다시 고개를 위로 올려, 사내의 눈을, 자신의 얼굴을 한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제…. 이제 저를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의 이름을 저에게 가르쳐주시어, 평생 따르게 해 주십시오."


  라이조는 책을 읽어 내려가듯이 술술 말했다. 그가 얼마나 이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던지, 자신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여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눈물을 참고 닦아내는 데에 그쳤던 라이조는 생각한다. 기쁨의 눈물은 그렇게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흐르는 대로 놔두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사내는 라이조에게 잡힌 손은 그대로 두고, 다른 손을 라이조의 머리 위에 얹었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라이조의 간절한 눈이 감길 생각도 없이 계속해서 사내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 무겁게 닫혀 있던 사내의 입이 열린다.


  "나는…."


  사내의 이름이 천천히 입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하치야 사부로."


  사내는 라이조의 얼굴을 끌어당겨 안았다. 방금 전 거울조각을 끌어안았던 라이조와 같이, 소중한 듯이 품에 가두었다.


  "네 수호신이 되어 주겠다."


  똑같이 생긴 사내 두 명이 달빛 아래서 껴안고 있는 광경은 꽤나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라이조는 그 품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 이였다.


  눈물이 가득했지만, 도령은 웃고 있었다.




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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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D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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