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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야 사부로 X 후와 라이조][쌍닌]
네 모습. 그리고 내 모습.
점심시간의 식당은 분주했다. 분명 부엌 안은 아주머니 한 분 밖에 없을 텐데도, 아이들이 들어오는 족족 따끈한 그릇들로 채워진 식판이 나온다. 절대 밀리지 않는 줄이 주르륵 들어간다. 자리는 학생 수 만큼 적당하고, 금방 빠져나가서 막히는 일도 없었다. 라이조는 사부로가 오기 전까지 한참동안 복도를 맴돌며 메뉴를 고르고 있다가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참이였다. 오늘은 B코스가 맛있어 보이는 걸. 하는 사부로의 지나가는 한 마디에, 그럼 나도 B코스로 할까. 하고 따라 정해버렸던 것이다.
" 메뉴가 여러 개 나오는 날이면 항상 문제네. 그렇지, 라이조? "
" 응…. 네가 안 왔으면 점심시간이 끝날 뻔했어. "
" 그 정도야? "
라이조는 울적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젓가락을 들고 손바닥을 맞부딪힌다. 어쨌든, 잘먹겠습니다. 중얼거리고 따끈한 밥그릇을 한 손으로 감싸 드는 라이조를 사부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본다.
" …? 왜, 사부로? "
" 그냥. 식겠다, 얼른 먹자. "
김이 사근사근하게 손을 간질이던 푸근한 밥상은 금세 깔끔하게 비워졌다. 남기는 것은 용서치 않습니다! 하는 아주머니의 말은 거역할 수 없지. 사부로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그릇 위에 가로로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다 먹었어? "
" 응, 오늘 잠깐 약속이 있으니까. 조금 이따 봐, 라이조. "
" 알았어. 이따 봐. "
라이조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손을 흔들어보였다. 사부로는 아주머니에게 식판을 드린 뒤 급하게 식당을 나갔다. 라이조는 사부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는다. 약속? 누구랑 한 약속인 거길래, 저렇게 급하게? 따라 가 봐야겠어. 왠지 신경쓰여서 얼른 남은 밥을 그러모아 입에다 넣고 반찬을 쑤셔넣는다. 라이조의 식판도 금방 깔끔해졌지만 너무 한꺼번에 넣었던지 삼키기가 힘들어 한참을 콜록거렸다. 아주머니가 급하게 다가오셔서는 물을 건네주신다.
" 자, 급한 일이라도 있어? 천천히 마시고 가 보렴. "
" 가, 감사합니… 캑, "
꿀꺽꿀꺽, 급하게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빈 컵을 아주머니께 건넨 뒤 바로 식당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라이조. 물론 나간 지 한참 되었으니 보일 리가 없다. 텅 빈 마루.
"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
이미 따라가기는 글렀다고 판단하고 산책이라도 하며 갈 만한 곳을 둘러보기로 결정한다. 물론 외출한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안에 있길 바라야지. 타박타박 걸으며 창고 뒤쪽이나 안 쓰는 교실 쪽을 기웃거려본다. 한참 인술학원을 뒤졌지만 그저 휑하게 낙엽이 날리거나 1학년 아이들 몇몇이 놀고 있었을 뿐, 사부로가 나올 기미는 없어 보여. 기다려 달라고 할 걸…. 푹 한숨을 쉬는데 쿠쿠치가 물 묻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아, 혹시 사부로를 봤을지도 몰라. 라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뛰어 가 크게 이름을 부른다.
" 헤이스케! 사부로 못 봤어? "
" 어…, 라이조?
쿠쿠치가 달려오고 있는 라이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라이조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헥헥거리며 숨을 고르고는 다시 물었다.
" 사부로 말이야, 오늘 약속이 있다고 들었는데… "
" 아아, 안 그래도 방금 같이 있었어. 두부 만드는 걸 도와준다고 했었는데…. "
" 그, 그래? 고마워. "
그렇다면 항상 쿠쿠치가 두부를 만들던 곳에 있을 것이다. 라이조는 쿠쿠치가 걸어가는 쪽의 반대쪽을 향해 뛰어가다시피 한 빠른 걸음으로 흙을 밀어냈다. 어쩐지 오기가 생긴다.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를 찾아내서 오늘은 함께 있겠다는 그런 약한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서이다. 독점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신경쓰여서, 라이조는 무심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일명 '쿠쿠치의 두부의 방'에 도착한다.
" 사부로, 있어? "
조용히 고개를 들이밀며 사부로를 불러 보았다.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잠깐 멈추더니,
" …? 라이조? 왠 일이야? "
하는, 쿠쿠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라이조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분명 방금 만나고 온 건 쿠쿠치 헤이스케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쿠쿠치 헤이스케가? 이게 무슨…. 혼란스러워졌다. 그 새 돌아왔을 리는 없다. 방금 전 만났던 쿠쿠치는 반대쪽을 향해 걷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이 사부로의 변장?
" 아, 아야, 라이조, 아파! "
" 이 쪽이 아니네?! 미안! "
" 무슨 소리야! "
무심코 설거지를 하고 있던 쿠쿠치의 볼을 잡아당겨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어나는 가짜 피부가 아닌 쿠쿠치의 고통의 비명이였다. 화들짝 놀라 손을 급히 떼고 사과하는 라이조.
" 방금 두부를 만들다 말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너를 봐서…. "
우물우물 그에게 전말을 말하자, 쿠쿠치는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마저 손을 닦고 탈탈 털었다. 남은 물기를 옷에 쓱 닦고는 라이조의 이마에 톡, 짧은 딱밤을 먹여 준다.
" 네가 속았네. 저 쪽이 가짜니까 얼른 따라가. "
" …. "
형용할 수 없는 얼굴표정의 라이조. 어쩐지 속아서 분했다는 감정보다는 변장한 사부로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본인을 찾고 있었다니, 부끄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면서 화가 난다. 약속이 있다던 게 이거였어? 쿠쿠치의 변장을 하고 학원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거?
" 그래…. 고마워. 그럼 찾으러 가 볼게. "
속이 조금 끓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쿠쿠치는 의아하게 라이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두부 만들기에 열중하러 가는 쿠쿠치. 라이조는 생각한다. 쿠쿠치로 변장한 사부로가 향했던 곳으로 쭉 가면, 아마 생물위원회의 사육장이 나올 것이다. 하치자에몽과 만나려는 건가? 다리를 다시 빠르게 움직여 걸음을 재촉했다. 방금 전 변장한 사부로와 만났던 그 길목을 지나서, 몇 분 정도 더 걸어가면 느껴지는, 점점 늘어나는 초파리들. 손으로 툭툭 쳐내어 가며 다시 사육장을 기웃거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 라이조! 우리 사육장엔 무슨 일이야? "
" 우와악, 하치자에몽…! "
" 뭘 그렇게 놀라? "
타케야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잠자리채를 어깨에 얹어 둔 채 다른 손으로 채집자루를 들고 있었다. 이제 막 먹이를 잡아 온 거겠지. 라이조는 멋쩍게 웃으며 머뭇거리다가 타케야에게 묻는다.
" 아니…, 쿠쿠치로 변장한 사부로가 여기 오지 않았나 해서. "
" 쿠쿠치로 변장한 사부로? 그냥 사부로는 봤는데. "
" 그래? 어디서? "
" 방금 학급위원장 위원회 일이 있다면서 여기서 꺾고 교실로 들어갔어. "
" 고마워! "
라이조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급하게 발길을 돌려 이제는 뛰어가면서, 뒤로 고마움의 손짓을 하고 그대로 달려나간다. 타케야는 헛웃음을 짓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달칵거리며 사육장의 나무문을 걸어 잠구었다.
" 학급위원장 위원회가 쓰는 교실이…. "
라이조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그럼에도 낡아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는 나무판이 있기 마련. 당황하며 발을 황급히 뗀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만히 서서 조용히 발을 내려놓는 라이조.
' 내가 왜 사부로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는 거지? '
자신은 당당하다. 그냥 친구를 만나러 온 게 아닌가. 사부로는 쿠쿠치로 변장해서 자신을 놀려먹은 뒤 제 갈 길을 갔던 것 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화내는 건 괜찮지만 섭섭해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고. 더욱이 사부로가 자신을 피하기 위해 속였다고도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엉켜버려서 그런지 라이조는 벽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이 건물 어딘가의 교실에서 회의나 하고 있겠지 뭐. 기다리고 있으면 여길 지나 나올 테니까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자. 하고 생각하며 다리를 모았을 때였다.
" 난 말이지, 사부로의 본모습이 쬐끔 보고싶어져서. "
칸에몽이다. 가까이 있는 교실이야. 라이조는 벽에 귀를 찰싹 댄다.
" 내 본모습? 그렇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으니 말이야. "
아, 사부로의 목소리다. 라이조는 자세를 바꾸어 벽에다가 얼굴을 더 바짝 댄다. 두련두련한 말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린다.
" 라이조한테도? "
" 당연하지. 뭐, 네가 잘 도와준다면…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
" 분발해야겠는걸. 그럼 뭐 부터? "
" 일단은 손 잡는 거? "
" 생각보다 순수한 발언이네. "
" 물론 접문부터 하고 싶지만. "
" 접문…. 뽀뽀 말하는 거야? "
" 왜, 혀도 집어넣을까? "
" 푸하하, 관둬, 관둬. 낯간지럽게. "
무슨 대화지? 라이조는 손으로 벽을 쓸어내리며 조금 더 집중하려고 애썼다. 더 이상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와 옷자락이 책상 위에 쓸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라이조는 쪼그려앉아 숨을 내뱉는 듯 마는 듯 미세하게 뱉어낸다.
-
…. 사부로와 칸에몽은 조용하게, 먹을 품은 붓을 종이에 문질렀다. 사부로가 먼저 손짓을 한 덕이다. 바깥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누구? 아마도 날 따라온 라이조겠지. 예상대로겠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칭찬도 함부로 못하겠구만. 둘의 대화가 종이 위에서 이어진다.
[ 이만 나가 볼까. 라이조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
[ 조금 더 애태우게 하지 않고? ]
[ 글쎄…. ]
사부로는 뜸을 들였다. 칸에몽도 힐끔힐끔 바깥을 보며 눈치를 준다. 미묘한 숨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칸에몽은 책을 소리나게 덮어버린다. 복도의 바닥이 미세하게 움직인 소리가 났다. 라이조가 놀랐나?
" 좋아, 그럼 갈까. 너무 심하게 하진 말라고. 사부로. "
칸에몽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로가 일어난 그를 째려본다. 너무 티나게 말하지 마. 칸에몽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슨 상관이야. 제대로 하라는 거지. 라이조에게 마음이 있는 거잖아?
" 우유부단하게 미루지 말라는 거야. 내 말은. "
" …그래. "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사부로. 칸에몽의 말에 조금 뜨끔하는 듯 싶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시선을 다시 아래로 거두고 그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라이조가 후닥닥 건물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뒤꿈치를 세우고 달려야지, 라이조. 급하긴. 칸에몽에게 바깥을 손짓하며 피식 웃는다.
" 그럼 이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
" 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 중에 제일 소심한 성격이니 그럴 만 하다. 조금 긴 복도를 걸어나가는데, 칸에몽이 뭔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사부로에게 말한다.
" 네가 먼저 나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
사부로는 잠시 멈춰 선다. 조금만 더 걸어나가면 문을 지난다. 저 문 옆엔 분명히 라이조가 있을 테고, 칸에몽과 내가 같이 나간다면…. 아마 라이조는 자리를 피해주려고 할 것이다. 안 되지, 안 돼. 고개를 끄덕이고,
" 그럼 내가 나가고 나서 나오는 거다. "
한다. 칸에몽은 갑자기 밝아지는 사부로의 얼굴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린다. 라이조 일이라면 한 마디만 해도 다 꿰어찬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으면 사부로는 어느새 문 바깥으로 나가는 도중이다. 진짜 지극정성이군.
" 어라, 라이조? 여기 있었네? "
그리고 연기까지.
" 아…. 사부로. 하치자에몽한테 듣고 기다리고 있었어. 학급위원장 위원회의 회의였던거지? "
" 음, 비슷한 거. "
그렇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오늘 일은 어디까지나 잠시동안 라이조와 거리를 잠시 두고 반응을 보려는 것이였으니까. 게다가 생각대로 라이조는 잘 따라와주었다. 일부러 쿠쿠치의 얼굴을 빌려 반대로 길을 가게 만들었는데도 방이나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하치자에몽에게까지 가서 물어 찾아온 거니까. 그래, 이미 하치자에몽에게 라이조가 오면 학급위원장 위원회의 회의실에 있다고 전해달라 당부해두고 왔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회의가 아니였다. 그냥 시간을 잠시 죽였을 뿐.
" 여, 사부로! 오늘 재밌었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
칸에몽이 툭 등을 주먹으로 치고 쌩하니 지나갔다. 저만치 달려나갔을 때, 어라. 라이조도 있었네! 안녕! 하고 제 갈 길로 가 버린다. 갑자기 멍해진 라이조.
" 라이조? "
" 어…! 응? "
" 멍하게 있긴. 무슨 일 있었어? "
" 아니…. "
왠지 그가 시무룩해보여서 사부로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혹시 오늘 뭔가 할 말이 있었던걸까. 날을 잘못 잡았나? 수업이 많은 날에 자연스럽게 거리를 뒀으면 정신이 없어서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뭔가 기분좋아지게 할 만한 게….
" 맞아. 수업 없는 날에, 시간 있어? "
" 그 날에? "
라이조는 한참을 고민한다. 사부로는 불안해했다. 분명히 라이조는 그날 잡힌 약속이 없을 텐데. 잠시 없었던 사이에 도서위원회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카자이케 선배한테는 양해를 구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빼내야 할까….
" 어디 가려고? "
사부로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다행이야, 그냥 갈까 말까 고민만 했던 거구나. 라이조가 저번에 좋아했던 게 뭐가 있었지. 얼른 생각해내라, 사부로.
" 오랜만에 마을에 나가서 우동이나 먹을까 하고. 저번에 임무 나갔을때 먹었던 거. "
" 아. 그거 좋지. 알았어. "
좋아. 약속은 잡았다. 사부로는 라이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
" 칸에몽이랑은 무슨 사이야? "
" 응? "
우동국물을 입에 담은 채로 뱉어버릴 뻔한 사부로는 가까스로 입안의 내용물을 삼켜내는 대에 성공했다. 목을 넘어가는 뜨거운 액체가 따끔해서 더운 숨을 내뱉은 다음, 라이조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사이냐니?
" 같은 위원회 사이?…. "
" 그래…. "
대답을 들은 라이조의 표정이 시원찮다. 라이조는 무슨 답을 원했던 거지? 사부로는 남은 국물을 그릇째로 들이마셨다. 라이조의 젓가락질은 소심하게 깨작거리는 중이다. 턱을 괴고 그가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부로.
" 정말 그것 뿐? "
" 그 이상은 없는걸. "
젓가락으로 면발 하나를 들다 말고 재차 묻는다. 사부로는 의아하게 다시 대답한다. 라이조가 칸에몽을 신경쓰다니, 별일이네. 혹시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걸까. 그렇다면 안 되는데.
"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먹어도 돼. 라이조. "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싶어 사부로가 언급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라이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보였다.
"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
왠지 그 웃음이 슬프게 보여서 사부로는 불안함을 느꼈다. 괜찮다고?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인데. 뭔가 신경쓰이는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러가지 생각해본다. 며칠 전에 거리를 둔다던 게 더무 멀리 뒀었나? 그 때 쿠쿠치가 무슨 이상한 말을 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하치자에몽이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걸 라이조에게 말한 걸까? 의문이 끝이 보이지 않도록 사슬을 이어간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다.
" 다 먹었다. "
" 오, 그래. 그럼 이제 나갈까. "
" 응. "
하지만 라이조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아무리 라이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부로라 해도 그의 제대로 된 생각을, 그리고 걱정을 알아낼 방도는 없다. 불안해서 안 되겠어. 나올 기회도 별로 없는데, 오늘 말해버릴까…. 하고 결심하는 사부로. 그런데 라이조가 먼저 말을 꺼낸다.
" 나는 사부로를 독점하지 않을게. "
드디어 뭔가 말 해 줬어! 하고 화색이 돌려고 하다가, 도로 얼굴빛이 죽어버리는 사부로. 무슨 말이야? 하고 반박하기도 전에 라이조는 말을 계속해서 잇는다.
" 다른 사람이 좋다면 나를 놓고 가도 괜찮아,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소홀해지지 마. "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이조? "
라이조는 우뚝 멈추어 섰다. 주위가 조용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골목 안에서, 라이조는 사부로에게 가까이 다가와 꽉 껴안는다. 사부로의 머릿속에서 온갖 잡소리가 맴돈다. 라이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건, 나에게 주는 신호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좋아. 라이조의 어깨에 손을 올려 주고 같이 안아주자, 그게 지금으로썬 제일 나은….
" 칸에몽을 좋아하잖아. 아니야? "
" ? "
라이조의 어깨에 올라가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조심스럽게 감싸안으려던 것은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대로 붙어 있던 라이조를 제 몸에서 떼어내 눈을 마주친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조금의 화가 치밀어오른다.
" 라이조. "
내가 얼마나 너에게 신경을 써 줬는데, 너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그 하루동안의 일로? 어쩐지 괘씸하다. 너에게 내가 주었던 감정과 많은 행동들이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 잘 생각해 봐. "
사부로는 라이조의 턱을 아래에서 감싸잡아 들어올렸다. 라이조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 손의 힘이 풀릴 뻔했지만, 강행했다. 입술을 맞춰 얼굴을 밀착하고, 떨어지지 못하게 머리를 감쌌다. 라이조는 사부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가만히 몸의 힘을 풀고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로는 그의 입술을 이빨로 살짝 깨문다. 따끔함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라이조.
" 윽…. "
" 왜 가만히 있어? "
" …사부로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
아. 미치겠다. 사부로는 그를 벽으로 밀어버리고 팔 안에 가두었다. 라이조가 시선을 피한다. 입술 한 쪽이 빨갛게 피가 돌았다. 방금 전 깨물었던 곳이다. 사부로는 라이조의 입술을 제 지문으로 꾹 누르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 누가 그래? "
" 흣, 따가… "
" 누가 그랬냐고. "
라이조는 사부로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다. 제대로 눈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싫었던지 사부로는 방금 전처럼 다시 턱을 감싸잡고 얼굴을 고정시킨다.
" 그게, 그…. 나 혼자서, "
" 혼자? 혼자서 그렇게 생각한 거라고? "
" …. "
라이조는 목에서 짧게 침을 삼키는 소리를 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로가 자신의 이마를 턱 짚으며 한숨을 쉰다.
" 아니야. 아니야, 라이조. 모르겠어? "
라이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바닥을 향해 내리깔았다. 사부로는 어디에서 화가 난 거지? 불안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민하고 있을 때 사부로는 다시 그의 입술을 덮었다. 턱을 감쌌던 손이 어느새 볼을 쓸어내린 뒤 허리를 감싸안았다. 라이조는 당황한 상태로 갈 곳 잃은 손을 사부로의 어깨 위에 짚어 둔다. 그의 혀가 따끔했던 그 입술을 핥아준다. 뜨거운 느낌에 뒤로 물러서지만, 벽에 막혀 옴짝달싹 못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하고 떨리는 눈으로 사부로를 바라보니,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어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진다. 눈을 감는다.
입술을 핥는 그의 혀가 물컹하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무심코 내밀고 있던 혀와 섞여 얽히며 파고들어온다. 매듭을 짓는 듯한 그 움직임에 조금 주춤하다가 엉성하게 밀착해들어갔다. 사부로의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져, 라이조는 고개를 조금 숙인다. 사부로가 다시 턱을 밀어올려 붙는다. 그는 소리가 날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흐를 것 같이 넘쳐나는 침을 삼켜댄다. 부끄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사부로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스르륵 내리니 손목을 잡혀버린다. 그제서야 입술을 다시 핥으며 얼굴을 뗀다.
" 이젠 알 것 같아? "
" 사부로…. "
라이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로 사부로를 꽉 안았다. 다른 감정으로 팔 안에 가두었다. 사과와 함께 판단이 실린 무거운 결정이였다. 그랬다고 라이조는 생각했다.
" 내 얼굴을 봐. 라이조. "
눈만 위로 살짝 올렸다. 이마에 무언가가 닿았다가 떼어진다. 그가 입을 맞추었다.
" 네 얼굴이야. 내 얼굴이기도 하고. "
라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안도감인 걸까. 사부로는 자신의 턱 부근을 잡고 손톱을 세워 살짝 들어낸다. 그대로 가면을 재빠르게 잡아들고 라이조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야. "
" …사부로? "
" 네 모습일 때도, 내 모습일 때도. 사랑하고 있으니까. "
" …. "
" 이제 눈 제대로 뜨고 다녀. "
사부로는 라이조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소유욕에서 온 것일지도 몰랐지만 라이조는 저항하지 않은 채 끌려갔다. 그리고 품에 폭 안겼다. 고개만 위로 올려서 사부로를 마주본다. 이제는 피하지 않는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어서, 사부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번에는 라이조가 입을 맞추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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